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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21 16:46 수정 : 2006.11.21 16:46

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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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정치경제적 중도의 원조였다면, 그 철학적 뿌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에 내리고 있다. 유미죽을 마시고 건강을 회복한 부처는 삼매(쾌락, 평정)의 수행이나, 고통의 수행(고행)을 떠나, 중도적 수행인 선정에 든다.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싯달타는 일성으로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고 선언한다. 불사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므리타라다. 비사(非死) 혹은 무사(無死)로 뒤칠 때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말이다.(김성철 동국대 교수) 싯달타는 죽음이란 죽음이 아니며, 죽음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의 주제는 중도였다. 성철 스님은 중도란 연기(緣起)의 이치로 바라본 사물의 실상이라고 했다. 인연에 따라 풍수지화(風水地火)가 뭉치면 사물이 되고, 인연이 다하면 풍수지화로 돌아간다. 정신적 작용 역시 인연에 따라 쌓인 것이 습관이 되고, ‘자아’ 정체성이 된다. 그것이 흩어지면 나도 정체성도 사라진다. 이렇듯 존재란 생사와 유무 등 극단을 초월하여 있다. 죽음이 없으니 남도 없고, 남이 없으니 죽음도 없다. 언제나 그대로인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구름과 호수, 젖소와 농부를 보게 된다면 불성을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바닷물은 태양의 작용으로 수증기가 되고 또 구름이 된다. 구름은 바람의 힘으로 흩어지고 뭉치다가 비가 되어 호수에 내린다. 농부와 젖소 그리고 노동이 더해지면 아이스크림이 된다. 만물은 끝없이 이어질 뿐, 있지도 없지도 않다. 시간과 공간 또한 4차원 속에서 융합한다.

중도 지식인들이 화해상생 마당을 결성했다. 김지하씨는 중도를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고 설명했다. 양 극단을 떠나되 중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뜻풀이 그대로 좌우 상하 빈부 등을 역동적으로 융화할 것인지 지켜본다.

곽병찬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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