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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8 18:43 수정 : 2019.11.19 02:46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산골에서 서른아홉살 혁명가 체 게바라가 미국을 등에 업은 군사정권의 총탄에 스러졌다. 볼리비아 민중은 1982년 중도좌파 정당이 집권하기까지 15년이나 더 군부 독재의 폭압에 신음했다. 이후 군부가 뿌리인 우익 정당과 중도좌파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던 중, 2006년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남미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 선출된 것.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채, 코카 재배 농민운동에 앞장섰던 에보 모랄레스(60)였다. 당시 볼리비아는 천연가스와 주석 등 풍부한 자원 보유국이면서도 남미의 최빈국이었다. 외국의 다국적 업체들이 생산과 이익을 독점했다.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원주민 대다수는 극심한 빈곤 속에 코카 재배로 연명했다.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선거 부정 논란 끝에 야권과 군부의 사퇴 압박으로 물러난 지 사흘 만인 지난 13일 멕시코로 망명해 멕시코시티 시청 청사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멕시코시티/AFP 연합뉴스

모랄레스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에너지산업 국유화와 부의 재분배 정책을 밀어붙였다. 나라 안팎에서 으레 ‘복지 포퓰리즘’ 시비가 일었지만, 대개는 가진 자들과 보수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 시장 자유주의 집단의 목소리였다. 경제성장과 빈곤층 생활 개선에 힘입어, 2009년과 2014년 대선까지 연거푸 3선을 기록했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은 ‘볼리비아의 불평등·빈곤 감소에 대한 설명’ 보고서를 냈다. “2000년 이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80% 늘었으며(…), 불평등과 빈곤의 감소는 주로 밑바닥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 및 소득 재분배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모랄레스의 장기집권 욕망이 화를 불렀다. 최근 몇 년 새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천연가스 수출 급감은 정치적 위기를 부추겼다. 2016년 4선 개헌에 실패하자 대법원의 ‘연임 제한 위헌’ 결정을 끌어낸 뒤 지난달 대선을 치렀다. 미주기구(OAS)까지 거든 개표 부정 논란 끝에 반대 세력과 군부에 쫓겨나다시피 물러났다. 그는 미국이 뒷배인 군부와 우파의 ‘쿠데타’라고 주장하는데, 아직 증명된 건 없다. 현재 볼리비아 정국은 극심한 혼미 상태다. 야당의 자니네 아녜스(52) 상원 부의장이 임시 대통령직 승계를 선언했으나, 볼리비아 원주민들은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6일 미주기구 산하 미주인권위원회(IACHR)는 지난달 20일 이후 시위 사태로 최소 23명이 숨지고 715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했다.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하고 멕시코로 망명한 지난 13일, 수도 파라스에서 원주민들이 ‘위팔라’ 깃발을 들고 모랄레스 지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라파스/로이터 연합뉴스

볼리비아 시위대는 안데스 지역 원주민의 정체성을 표현한 ‘위팔라’ 깃발을 든다. 옛 잉카제국의 구성 지역을 각각 대표하는 일곱가지 색깔 정사각형 조각들이 가로세로 일곱줄로 배열됐다. 위팔라의 영토는 오늘날 볼리비아와 페루,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의 일부까지 아우른다. 모랄레스는 2009년 개정 헌법에 위팔라를 볼리비아의 기존 국기와 동등한 국가 상징물로 규정했다.

위팔라의 빨간색은 ‘대지와 안데스 사람들’, 주황색은 ‘사회와 문화’, 노란색은 ‘에너지와 강건함’, 하얀색은 ‘시간과 변화’, 초록색은 ‘천연자원과 부’, 파란색은 ‘하늘과 우주’, 보라색은 ‘안데스 정부와 자치’를 상징한다. ‘볼리비아 공화국’이던 국호를 ‘볼리비아 다민족국가(스페인어 Estado Plurinacional de Bolivia, 영어 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로 바꾼 것도 이때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이 멕시코로 망명한 13일, 우파 야당 정치인 자니네 아녜스(52·사회민주주의운동) 상원 부의장이 임시 대통령에 오른 뒤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뒤로 왼쪽에 기존의 국기, 오른쪽엔 모랄레스가 2009년 개헌 때 국기와 동등한 국가상징물로 지정한 안데스 원주민의 전통 깃발 ‘위팔라’가 걸려 있다. 라파스/AFP 연합뉴스

‘볼리비아’라는 국명은 18세기 전반 남미의 대통일 공화국을 꿈꿨던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모랄레스는 피부색과 빈부의 차별 없이 다민족이 어우러지는 남미의 무지개 국가를 꿈꿨는지 모른다. 하지만 설득력을 잃은 과욕이 공든 탑을 흔들고 나라를 혼란과 위기에 빠뜨리고 말았다.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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