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도씨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강한 평안도 사투리만 아니었다면 60대 이상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을 것이다. 2008년 아내와 사별한 뒤 의정부에서 혼자 지낸다는 그의 건강 비결은 전철에서 절대 안 앉기, 항상 책 들고 다니기, 친구들에게 편지 쓰기. 그는 건강을 위해 산에 다닌다고 하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건강은 등산의 부산물일 뿐이지, 그게 어떻게 등산의 목표냐고 반문했다. 그런 그에게 등산의 의미를 묻자, “인생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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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만난 사람 원로 산악인 김영도씨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한국이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정복때 원장대장등반 위험할수록 신중하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야
“오은선 ‘완등 시비’ 중요치 않아…이미 높이 평가” 지난 10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루트를 내기 위해 네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박영석은 미수(米壽: 88살)를 맞은 산악계 대선배 김영도에게 편지를 쓴다. 미수연에 참석하지 못한 대신 이번 등반을 성공해 생일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탐험가에게 정년은 없다. 나도 내 나이에 맞는 탐험과 등반을 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짐이 되면 뒤로 물러나 베이스캠프의 매니저가 될 것이다.”(김영도 미수축하문집 <77인에게 묻다>에서) 박영석(48)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신동민(37), 강기석(33)과 함께 설산의 검은 입속으로 사라진 뒤 촉망받는 두 산악인 김형일(44)과 장지명(32)이 촐라체 북벽에서 추락했다. 11월11일이었다. 한국 등반계는 불과 한달여 사이에 대표적인 등반가 2명과 차세대 주자 3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박영석의 실종 소식이 국내에 처음 전해진 10월20일은 김영도의 미수연이 열리던 날이었다. 왜 산에 가는 것일까? 위험한 줄 알면서도,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산악인들은 고산거벽을 향한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오지 못한다. 위대한 탐험가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는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도전”이라고 했지만 그도 매킨리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산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박영석 편지의 수신인 김영도 선생을 만났다. 1924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8살이다. 그는 1977년 우리나라가 세계 8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 원정대장이었다. -한달새 저명한 모험가 2명과 유망한 등반가 3명이 산화했다. 근래에 없던 비극이다. “높은 산, 특히 히말라야와 같은 설산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다. 따라서 언제나 사고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더구나 요즘 세계 산악계의 흐름은 등정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지금의 추세는 남들이 가지 않는 어려운 코스를 가능한 한 등반가 자신만의 힘으로 개척하는 것이다. 우리 산악계도 최근 알파인 스타일의 이런 등반 사조가 강조되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도 생기는 것 같다.” -알파인 스타일이란?
“등산가 단독 혹은 2~3명이 기존에 설치된 로프 없이 거의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단시간에 고산거벽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과 거대한 산이 맨몸으로 마주하는 행위 그 자체다.” -그건 위험천만한 도전인데, 그걸 시도하는 한 사고는 불가피한 것인가? “아마도. 산악인들에게 산은 무엇인가. 일본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유명한 소설 <빙벽>에 주인공 등산가의 이런 독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댄스를 하는 대신에, 마작을 하는 대신에, 영화를 보는 대신에, 우리는 눈 덮인 암벽에 간다’고. 산악인에게 산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려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이 독특한 세계에 발을 들인다. 산은 더 높을수록 더 매력적이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울수록 더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다. 그래서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아,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서 내려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성공은 없다. “물론이다. 위험할수록, 더 매력적일수록, 산악인은 그만큼 더 신중히 결정하고, 결정하고 나면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나는 산악인들의 출정식에서 자주 격려사를 하는데 꼭 이 말을 한다. 산은 늘 거기에 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가도 된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다.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라. 아무도 그걸 나무라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후원기업들의 상업주의가 과도한 경쟁을 부채질한다고 비판한다. “등산은 원래 돈하고는 관계가 없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프랑스 산악가 리오넬 테레(1921~1965)는 ‘등산은 무상의 행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등반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유명 회사들이 자사 홍보를 위해 돈을 대고, 등반가들은 그 돈 때문에 안 갈 수가 없어서 가기도 한다. 사실 박영석도, 김형일도 다 어딘가에 소속해 있었다. 후원사 간에 지나친 경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사고의 원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안된 이야기지만,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다.” -인간이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이른바 ‘등산’이란 개념은 언제 생겼나? “등산이란 개념은 근대적 개념이다. 서구에서는 보통 등산 역사를 250년 정도로 본다. 동양에서도 입산(入山)이란 철학적 종교적 개념은 있어도 지금처럼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개념은 없었다.” -현대적인 등반은 유럽의 알프스 등반부터를 시작으로 보는데. “18세기까지 유럽 사람들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에는 용이 산다고 믿었다.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786년 프랑스인 두 사람이 몽블랑을 등정한 때부터다. 이후 알프스 고봉은 1865년 난공불락이던 마터호른(4478m)을 영국인 산악가 에드워드 휨퍼(1840~1911)가 오른 것을 끝으로 모두 ‘정복’됐다. 그 후 정복이란 개념도 바뀌기 시작했고, 산악인들의 시선도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히말라야로 향했다.” -히말라야 8천m급 14개는 언제 초등됐나? “히말라야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1895년 영국인 앨버트 머머리(1855~1895)가 낭가파르바트(8125m)에 도전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안나푸르나(8091m)를 오른 뒤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가 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같은 해 독일 팀의 헤르만 불(1924~1957)이 가장 험난하다고 하는 낭가파르바트 초등에 성공했다. 그리고 1964년 중국이 중국령 티베트에 있는 시샤팡마(8013m)에 오르면서 히말라야 8천m급 봉우리 14개가 모두 인간의 발아래 놓이게 됐다. 산악계에선 이 시기를 알프스 등정의 ‘황금시대’와 견줘 ‘위대한 10년’이라고 부른다. 그 ‘위대한 10년’의 대열에는 일본도 있다. 일본은 1956년 마나슬루(8163m)를 초등했다. 이 등정은 전후 일본 부흥의 상징처럼 여겨져 전 일본인을 감격하게 했다. 그때 일본의 수출고가 100억달러였는데, 20년 뒤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 한국 수출액이 100억달러였던 것이 기억난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서구 등반사를 봐도 등반의 역사는 국력과 비례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산악인들이 말하는 등로주의란? “내가 어느 책에서 보고 퍼뜨린 건데,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란 말이 있다. 높이보다는 어떻게 오르느냐 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등로주의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인데, 머머리즘(머머리가 처음 주창한 것으로 난이도 높은 미개척 코스를 중시하는 산악 흐름)과 통하고 내 말과도 통한다. 나는 세계 산악사에서 등정주의는 이탈리아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67)가 히말라야 14개 봉우리를 처음 완등하고, 폴란드인 예지 쿠쿠치카(1948~1989)가 전인미답의 루트로 역시 14개 봉우리를 오른 것으로 끝났다고 보는 사람이다. 이제는 높이보다는 산을 오르는 과정이 목표가 되고 있는 시대다.” -어쩌면 그런 ‘야망’이 많은 산악인들을 산에 묻히게 한 건 아닐까? “어쩌면. 250년의 등산사는 결국 위대한 산악인들의 부침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 그것도 다 운명이며, 그 사람의 기운이다.” -한국은 1971년 마나슬루 원정 이래 지금까지 히말라야에서 모두 82명의 산악인을 잃었다. 한국의 산악가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등반가는? “고미영(1967~2009)이 먼저 생각난다. 고미영은 불과 40일 사이에 히말라야 8천m급 고봉 3개를 연달아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아마도 세계 유일일 것이다. 안나푸르나에서 돌아왔다면 세계에서 가장 멋진 여성 등반가로 사랑받았을 텐데, 참 아깝다. 1993년 여성원정대만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지현옥(1959~1999)도 잊을 수 없다. 박영석은 남북극과 에베레스트 정상을 모두 밟은 유일한 사람이다. 김형일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알피니스트로 앞으로 더 이룰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함께 에베레스트에 갔던 고상돈(1948~1979)도 잊을 수 없다.” -지금 활약하고 있는 별들 중에는? “오은선(45)과 김재수(50), 김창호(42), 박정헌(40)을 주목한다. 오은선이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봉우리를 올랐느냐 아니냐는 시비가 있었는데, 나는 중요하게 안 본다. 보통 8천m급 이상을 ‘죽음의 지대’라고 부르는데, 그곳을 14번 갔다 왔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메스너도 그의 책에서 오은선의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오은선이 시비 속에 싸여서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점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높이보다는 산을 오르는 과정이 목표인 시대
산에서 살아남거나 묻히는 건 운명이라 할밖에
한국의 등산세계,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야 -박정헌씨는 촐라체 조난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것으로 유명했다. “박정헌은 물건이다. 처음부터 높이보다는 난코스의 거벽에 덤벼든 인물이다. 그러다 손가락을 거의 다 잃기는 했지만. 김창호는 에베레스트만 빼고 히말라야 8천m급 13개 봉우리를 모조리 무산소로 올랐다. 앞으로 우리 산악계를 이끌 인물이다. 내가 박정헌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그의 책 <끈>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는 세계적 산악 베스트셀러 <터칭 더 보이드>가 있는데, 나는 그 책보다 <끈>을 더 높이 평가한다. 하루빨리 영어, 독일어, 불어 등으로 번역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을 잘 알고 한국어도 잘 아는 서양인 어디 없습니까?” -박씨는 패러글라이딩으로 2400㎞에 달하는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는 모험을 하는 중이다. 지금쯤이면 박영석 등이 묻힌 안나푸르나 상공을 날고 있을지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대모험이다. 우리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줘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경제만 가지고 발전을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술분야도 중요하지만 스포츠 중에서도 특수한 분야인 한국의 등산 세계를 널리 알려야 한다. 국민들도 산악 세계를 알든 모르든, 자신의 생활 속에 끌어넣건 아니건, 참으로 독특한 세계가 우리 인류의 생활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삶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빙벽>에 이런 시가 나온다. 히말라야 설산에 영혼을 묻은 진정한 산악인들을 위한 헌사 같아 소개한다. 친구인 네게 이 유서를 남기마/ 내 어머니를 만나다오/ 그리고 말해다오, 난 행복하게 죽어갔다고/ 난 어머니 곁에 있었기에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내 아버지에게 전해다오, 난 사나이였노라고/ 아우에게 전해다오, 이제 네게 바통을 넘긴다고/ 아내에게 말해다오, 내가 없어도 살아가라고, 네가 없어도 내가 살았듯/ 내 아이들에게 전해다오, 너희들은 암장에서 내 손톱자국을 보게 될 거라고/ 그리고 친구여, 네게는 이 한마디/ 내 피켈을 집어다오/ 피켈이 치욕으로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다오/ 거기에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른을 만들어다오/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다오.(로제 뒤플라의 시 ‘그 어느 날’) -진정한 등반의 성공은 정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와 가족이 있는 집에 돌아왔을 때라는 <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후배 산악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산악인에게 위험과 도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므로 운명 앞에 늘 신중하고 조심하여 반드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당당히 맞섰던 투쟁의 시간들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라. 그것이 진정한 등반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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