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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26 20:41 수정 : 2013.11.07 10:00

극지 연구의 산증인인 김예동 남극대륙기지 건설단장이 극지연구소에 차려진 극지과학홍보관에서 남극의 세종기지로부터 세계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 앞에 서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김예동 ‘장보고 남극대륙기지’ 건설단장

남극 기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미국 맥머도 기지의 얼어붙은 바닷가를 따라 20분쯤 걸어가면 오두막 하나가 나온다. 아문센과 남극점 정복을 다투다 경쟁에서 뒤진 뒤 악천후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국 해군 대령 로버트 스콧(1868~1912) 일행이 처음 맥머도 만에 발을 디딘 곳이다.

얇은 널빤지로 엮어놓은 이 오두막은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남극의 추위 앞에 한없이 무력하고 초라해 보인다. 내부에는 그 시절 탐험가들의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고, 빨랫줄에는 그들이 입던 빛바랜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과학적 발견, 탐험, 정복’이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구호 아래 이 초라한 오두막에서 남극점 정복의 열정을 불태웠던 20세기 초반 영국 탐험가들은 블리자드(눈폭풍)에 스러져 갔다.

김예동(58) 극지연구소(한국해양연구원 부설) 남극대륙기지건설단장과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1월17일 이 오두막 부근에 있는 맥머도 기지에서였다. 이날은 일본인 극지탐험가 시라세 노부(1861~1946)가 남극에 첫발을 디딘 지 100년하고도 하루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극지연구기관인 극지연구소에서 남극대륙기지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 단장과의 첫 대면은 이날 오전 장보고 대륙기지 부지 확정 기념식장에서였지만 서로 경황이 없어 수인사만 나눈 터였다.

공사를 위한 임시 컨테이너 몇 개만 놓여 있던 장보고 기지 예정지와 역시 소규모인 이탈리아 마리오추켈리 기지를 돌아본 뒤라 100여동의 건물이 들어선 맥머도 기지를 돌아보는 것은 더욱 새로웠다. 마중을 나온 맥머도 기지 조지 블레이스델 대표가 “27년 전인 1985년 처음 이곳에 왔다”고 하자 김 단장은 “나는 29년 전인 1983년 이곳을 찾았으니 맥머도 기지에서는 내가 선배”라며 웃었다.

남극 제2기지 건설 사령관 격인 김 단장은 1983년 남극을 탐험한 뒤 30여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한국 남극 연구사의 산증인이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한 소행성 마을처럼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의 맥머도 기지 거리를 걸으며 물었다.

인터뷰/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어떻게 1983년에 남극을 가게 됐죠?

“우연이 인생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그런 경웁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전공인 지구물리학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에 갔지요. 1981년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 갔는데 1년간 연구조교가 끝난 다음에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과장을 통해 남극을 연구하는 교수를 만나게 됐지요.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남극에서 몇달 동안 함께 연구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1983년은 내게 여러가지로 잊을 수 없는 해지요. 그해 9월1일 소련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 007기에 형이 조종사로 타고 있었지요. 남극으로 출발한 것이 10월이니 사고는 출발 한달 전이었습니다. 집에서 난리가 났죠. 무슨 소리냐 공부 못해도 좋으니 당장 귀국해라. 그러나 형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남극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했어요. 남극 연구를 그만둘 수가 없어서 귀국을 못했습니다.”

세종기지는 섬에 붙어있어 빙하연구 못해
장보고 기지도 내륙기지로 가는 중간단계

-처음 남극에 도착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흰색과 파란색 두가지밖에 없었어요. 창문도 없는 C-130 미군 수송기를 타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7시간 반을 날아서 내리니까 눈부신 세계가 펼쳐졌는데 하늘만 파란색이고 그 아랜 전부 흰색이었어요. 다른 색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멀리 눈 덮인 에러버스 화산에서 증기가 올라가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적막한 얼음덩어리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의 수증기 같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죽음 속에서 느끼는 생동감, 그런 것이었지요. 그때 함께 간 미국 교수가 말했어요. 이 풍경이 진정으로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 계속 남극에 오게 될 거라고. 속으로 그럴 리가 했어요. 내 평생 또 올 기회가 있겠냐고. 그런데….”

-오늘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그때는 학생으로 남의 나라 연구팀으로 따라간 거고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온 거죠. 1983년에 명함 내밀 게 뭐가 있었겠어요. 독재자 밑에 사는 후진국 백성이란 이미지죠. 지금은 대등한 파트너로서 얘기하게 되니까. 맥머도 기지는 별로 달라진 게 없군요.”

그렇게 시작한 남극 인연이 평생을 이어졌다. 김 박사는 남극 연구로 198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한국에서 세종기지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흔쾌히 거기에 몸담았다. 그 뒤 청춘이 남극과 함께 흘러갔다. 흥미로웠지만 이야기는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서로 경황이 없었고 한정된 시간 동안 남극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김 박사와의 인터뷰는 달이 바뀐 지난 16일 인천 송도새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대륙기지사업단에서 이어졌다.

-박사님 자료를 읽다 보니 좌우명이 ‘두려움을 떨치고 변화에 몸을 맡겨라. 남들이 모두 가는 길에서 얻을 것은 많지 않다’더군요.

“탐험가와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도전정신이 필수입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해요. 남이 한 것을 따라가면 그 분야에서 빛을 보기 힘들죠. 요즘 이공계 젊은 친구들 의대나 가려 하지 기초과학 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이건 국가적으로도 불행이에요. 진정으로 자기가 원해서 가는 길이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한 거예요. 스콧만 해도 결국 최초 남극점 도달엔 실패하고 비명에 갔지만 자기 한몸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도 암석 샘플을 끌고 온 그 정신으로 영원히 역사 속에 기억되고 있잖아요.”

-걸어온 길에 만족하나요?

“저는 흔한 말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정말 보람이 있어요. 저는 남들이 안 하는 남극 과학연구에서 최고 정상의 길을 걸어왔어요. 나 자신도 만족하면서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해요. 부모가 시키는 거 하지 마라. 자기가 원하면서 남이 안 하는 것 찾아라. 저는 우리나라의 극지 연구가 여기까지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1000km도로 뚫기 등 달 기지만큼 힘든 건설
중국은 3년전에 벌써 고원 정상에 기지 세워

-세종기지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는데 그때 얘기 좀 해보죠.

“당시 남극에서 쇄빙선 없는 나라가 갈 수 있는 곳은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밖에 없어요. 1987년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속도전으로 1년 만에 기지 건설을 끝냈지요. 월동대를 보낼 때 옷, 신발, 먹을 것까지 다 새로 만들어 보냈지요. 그 정도로 전혀 준비가 없었어요. 첫해에 15명이 남극 간다고 해서 영양사 통해 준비한 음식이 떨어진 거예요. 현대건설이 공사하는 동안 그들의 음식을 얻어서 먹고 살았어요. 그 정도로 자료도 없고 준비도 없던 시절이었죠.”

-남극 생활의 가장 어려운 점은?

“춥다는 건 문제가 안 돼요. 가장 큰 것은 심리적인 문제지요. 고립감. 겨울이 되면 몇달 동안 해도 없고. 남극에서는 삶이 단순해요. 블리자드가 불 때는 쉬어야 해요. 한번 불면 일주일씩 문밖 출입도 못하며 갇혀 있는 거예요. 블리자드 소리 들어보셨어요? 겁이 나지요. 맹장염이라도 걸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예전에는 인터넷도 없었어요. 위성전화 하나 가지고 갇혀 있는 거지요. 매년 몇달씩, 어떤 때는 1년 내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죠. 그래도 저는 이 생활을 즐겼어요.”

-남극 연구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2003년 전재규 대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였습니다. 해양연구원 극지연구센터장을 하고 있을 때죠. 결과적으로 그의 희생이 쇄빙선 아라온호 건조, 극지연구소 설립 등 우리나라 극지연구 발전의 기틀이 됐어요. 그 전에는 막말로 15명 파견해 놓고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거든요. 남극에서 쇄빙선이란 것은 신발과 같은 것인데 신발을 안 신고 20년 동안 있었던 거예요. 당시 세종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 바다 건너 칠레기지에 있었어요. 세종기지로 오려면 조그만 보트를 타고 언제 블리자드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바다를 10여㎞나 헤쳐가야 했지요. 빠르면 30분, 길면 한두시간도 걸려요. 남극은 기상예보가 없거든요. 일주일에 한두번은 건너야 하는데 길을 잃어 헤맨 적도 많았어요.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들이었죠. 전재규 대원도 그 보트를 타고 수색작업을 나갔다가 유명을 달리했지요.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도 도사린 위험 중 하나예요. 1996년에 설상차를 타고 세종기지 뒤 빙원에 가다 크레바스에 빠졌어요. 다행히 설상차가 중간에 걸리는 바람에 살았지요. 크레바스는 위쪽이 얇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몇년 전 칠레 연구자 4명이 빠져 죽은 크레바스도 맨날 비행장 가던 길이었다고 해요.”

에너지·생물자원 풍부…인류미래 열쇠 쥔 땅
젊은이들, 남들이 가지않은 미지의 길 가보길

-남극 연구가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나요?

“물론이죠. 위험이 있지만 누군가 가야 하고 평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증가로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음을 발견한 곳이 남극이었지요. 남극에 매립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천연자원은 수십년 내 에너지 고갈 문제에 직면할 지구의 한 대안으로 얘기되고 있어요. 이밖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무수한 새로운 생물자원이 발견되는 등 남극은 인류 미래의 키를 쥔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에요. 그래서 매년 전세계에서 연구단이 파견돼 이곳의 고층 대기, 지질, 지구물리, 해양학적 환경 특성을 규명하고 동식물 생태계와 자원 등을 조사하고 있어요. 너무나 연구할 게 많아요. 남극 연구는 아직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두번째 남극기지인 장보고 남극대륙기지 건설의 의미는?

“세종기지는 섬에 붙어 있어 빙하 연구를 할 수 없었죠. 장보고 기지 건설로 드디어 본격적인 남극 연구의 장이 열리는 겁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장보고 기지도 제3 내륙기지로 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대륙 깊숙한 곳 빙원 위에 세울 제3기지죠. 중국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1985년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 기지를 지었지요. 그리고 1989년에 벌써 제2기지를 대륙에 지었고, 2009년에는 남극에서 제일 높은 고원에 제3기지인 쿤룬기지를 세웠어요. 내륙 깊숙한 빙원에 기지를 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선 육로를 통해 1000㎞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어야 해요. 장비도 스스로 개발해야 합니다. 내륙기지를 해야 남극 연구의 종결자가 되는 겁니다. 중국은 제2기지 건설에서 내륙기지까지 20년이 걸렸지만 우리는 2014년 장보고 기지 준공 이후 바로 시작해 2020년 완료할 겁니다. 내륙기지 건설은 엔지니어들에게는 달에 기지를 짓는 것과 맞먹는 도전이지요. 내륙으로 들어가는 코리안 루트를 개발해 고원 정상에 올라가 제3기지를 짓고 얼음을 시추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겠군요.

“남극 하면 아문센과 스콧 정도만 얘기하는데 그와 같은 시기 남극에 간 시라세 노부라는 일본 사람이 있어요. 100년 전인 1912년 1월16일 남극 땅을 밟았지요. 그는 당시 유럽인들보다 더 열악하고 힘든 상황에서 남위 80.05도의 극한지역까지 진출했지요. 그가 1911년 남극에 가겠다고 문부성에 지원을 요청했더니 당시 관리가 남극 같은 데는 체격 좋고 돈 많은 유럽·미국 사람들이나 가는 데지 우리가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지금 일본에서는 시라세 남극탐험 100주년을 맞아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남극과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어요. 남들이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을 가라.”

김예동 단장은
피격된 칼기 조종사 형 뒤로하고…20년간 매년 남극 방문

1983년 처음 남극 땅을 밟은 뒤 약 30년을 극지 연구에 몸바쳐 왔다. 1988년 남극 세종기지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했고 그 뒤 20여년 동안 한해도 빼놓지 않고 남극을 방문했다. 세종기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는 월동대장을 두 차례나 했고 초대 극지연구소장을 지냈다. 2002년 설립된 북극 다산기지도 그의 작품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다. 가는 데만 며칠이 걸려 진이 빠지는 남극에서의 생활은 위험하고 고독했지만 어딜 가나 자신이 딛는 발자국이 처음이란 게 그 모든 것을 무릅쓰게 했다. 그는 “남극은 넓은 대륙이지만 아직 인간이 딛지 않은 땅과 연구해야 할 분야가 너무나 많은 처녀지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1977년 서울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지구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과 2003년에는 남극 주변 해저와 북극 오호츠크해 일대에서 가스 수화물(하이드레이트)층을 발견해 지구 에너지 문제 해결의 새 전기를 마련했다. 가스 수화물은 석유를 대체할 연료로 꼽힌다. 그가 발견한 가스 수화물층 매장량은 한국이 30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분량으로 추정된다. 2005년 올해의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고 2009년부터 극지연구소 남극대륙기지건설단장을 맡아 제2 남극기지 건설 사업을 이끌고 있다. 아시아 극지포럼 회장을 지냈고 현재 국제남극과학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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