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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0 20:43 수정 : 2012.05.21 15:41

세계 8개 기구 챔피언에 도전하는 복서 김주희.

[한겨레가 만난 사람] ‘세계 8개 기구 챔피언 도전’ 복서 김주희
“자살 충동이라는 강펀치도 헝그리 정신으로 이겨냈죠”

가족 버린 어머니·치매 걸린 아버지
‘정상’ 올라도 생활고 계속돼 우울증
수면제 먹었다가 너무 억울해 깨어나

‘생얼’이다. 얼굴에 화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냥 스킨로션만 살짝 발랐다고 한다. 눈이 부셨다. 하루 힘을 다하고 지는 해의 부드러운 햇살을 투명한 피부가 살포시 껴안는다. 조그만 상처도 찾을 수 없다. 지난 8년 세계 정상을 지키며 무수한 주먹을 버텨온 얼굴이다. 다시 자세히 본다. 항상 가로세로 7m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 링 위에서 사냥개처럼 으르렁대며 싸우는 모습이나 도장에서 운동복 차림으로 땀 흘리는 모습만 보았기에, 이번엔 평상복 차림으로 만나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그런 모습으로 나왔다. 평범한 티셔츠에 군데군데 뜯어놓은 청바지, 그리고 빛이 바랜 운동화. “저는요, 예쁘니까 화장 같은 것 안 해도 되고요, 예쁘니까 낡은 옷 입어도 되고요, 운동선수니까 낡은 운동화 신어도 돼요. 호호호.”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 김주희(26·거인체육관)의 목소리엔 무언가 무거움이 묻어난다. 흘끔흘끔 그의 왼팔에 눈길이 간다. 그의 강력한 왼손 스트레이트에 상대 여성 복서들은 무릎을 꿇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져야 했다. 그의 팔뚝 힘줄이 불끈거린다. 16살 나이에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국내 첫 여자 복서가 돼 파란과 곡절 끝에 세계 7개 기구 챔피언 자리를 통합한 김주희. 현역 선수로 뛰는 26살 나이에 벌써 교육학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는 “억척스런” 그를 만난 건 그런 ‘도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였다.

김주희는 현역 선수로 정상에 있으면서 박사과정 첫 학기를 지내고 있다. 문대성의 논문 표절 사건이 떠오른다. 정말 열심히 공부는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김주희를 만나보고 싶게 한 것은 그가 보여준 도전정신이다. 그리고 좌절을 딛고 일어선 강인함이다. 그는 7년 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조처로 살아났다. 그리고 계속 챔프 자리를 지켰다. 모두들 몰랐다.

무엇이 그를 죽음의 벼랑에 몰아넣었고,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권투 하면 감량부터 떠오른다. 프로 데뷔 후 18전 16승1무1패. 16승 가운데 일곱번을 케이오(KO)로 이겼다. 11경기는 10회전까지 끌었다는 이야기다. 경기 전날 계체량 할 때까지 온몸의 수분을 쥐어짜며 한계체중에 맞추어야 하는 고통을 뒤로하고 선수는 사각의 링에 올라야 한다. 감량의 고통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키 160㎝에 평소 체중 53㎏ 정도이다. 한계체중 48.980㎏을 위해선 3~5㎏을 빼야 한다. 거의 체중의 10%를 줄여야 하는 셈이다. 피부 속 수분을 다 빼면 근육도 가죽처럼 얇아진다. 피부는 종잇장처럼 바삭바삭해진다. 물을 못 마시는 고통은 고문이다. 입안이 마르면 혀에 안티프라민을 바른다. 억지로 침이 고인다. 그나마 자꾸 뱉어내야 조금이라도 더 감량한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게 힘든 일을 왜 하는 것일까? 여기서 헝그리 정신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긴 시간 챔프로 있으면서 이미 선수 생활 초기의 헝그리 정신이 계속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 전세계에서 나를 목표로 매일 밤 샌드백을 치는 여자 프로복서가 5만여명에 이른다. 언제 어떤 돌주먹이 나를 캔버스에 눕힐지 모른다. 매번 방어전을 준비할 때마다 달리기와 스파링에 몰두하면 발톱이 6~8개씩 빠진다. 발톱이 빠진 발가락에선 운동화가 스치며 진물이 나온다. 내 방 한구석엔 그동안 빠진 발톱을 모아 놓았다. 그것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내친김에 물어보았다. 장기간 정상을 지키고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 필살기는 무엇인지.

“2002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세계 정상을 노리고 운동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그때 스승 정문호 관장님이 복부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명치보다 훨씬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곳을 집어준 것이다. 바로 왼쪽 옆구리 갈비뼈가 끝나는 지점이다. 여기는 간장, 신장, 비장, 췌장 등 각종 장기가 집결된 곳이다. 사과알만한 크기의 이곳을 제대로 맞으면 모든 장기에 고통이 다발적으로 전달되고, 3~5초 뒤 누구라도 앞으로 고꾸라진다. 잔인하지만 상대의 수비를 뚫고 그곳에 한 방을 쑤셔 넣기 위해 하루 수천번씩 복부 모양과 비슷한 샌드백을 쳤다.”

갈비뼈 밑 급소 공략법이 롱런 비결
감량때 같이 굶고 공부도 가르쳐준
스승 정문호 관장 은혜 꼭 보답할것

체육관 한편에 있는 김주희의 챔피언 벨트와 경기 당시 썼던 권투 글러브.
김주희는 본격적으로 권투를 배우기 전 자신이 왼손잡이인 것을 몰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왼손을 쓰는 김주희를 다그쳤다. 그래서 과일칼 등을 오른손으로 서툴게 쓰다 보니 왼손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생겼다. 권투를 하며 왼손이 제대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왼쪽 갈비뼈 끝을 공격하기 위해선 접근전을 해야 하고, 상대의 주먹에 얼굴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정 관장 특유의 조련술이 나온다.

“하루는 관장님이 백화점에 가서 수박, 멜론 등 단단한 껍질이 있는 과일을 사오셨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같이 먹자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비싼 과일을 아래층 복도 화장실을 향해 던지시는 것이었다.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징징 울면서 산산이 부서진 과일들을 모아 버려야 했다.”

그 뒤부터 김주희는 수비에 힘쓰게 됐다. 제자에게 깨진 과일을 보여주며 머리 방어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가르친 것이다.

필살의 복부 공격과 철통 수비를 장착한 김주희는 영등포여고 3학년 때인 2004년 12월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최연소 챔피언에 올랐다. 대전료 300만원. 학생 김주희에겐 큰돈이었으나, 한 집안을 책임진 가장 김주희에겐 별 볼 일 없는 액수였다.

그리고 김주희 내면에서는 남모를 불안과 우울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다음해 김주희는 한 화창한 봄날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위장이 꽉 차도록 수면제를 먹고 고통 없이 죽길 기다렸다. 아주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이미 깨끗이 극복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는 실직한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 언니(미나)와 나는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치매 증세가 심해지며 뒷바라지가 어려워졌다. 내가 아들이면 목욕도 쉽게 시켜드릴 수 있었을 텐데…. 언니는 공부하겠다고 미국에 갔고, 아버지 간병은 오로지 나의 몫이 됐다. 집안 곳곳에 아버지가 몰래 감춰둔 대변이 묻어 있는 아버지 속옷을 찾아내야 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대전료는 아버지 치료비로 다 들어갔다. 남모르게 우울증이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순간 김주희의 눈가에 물기가 번진다. 아! 물어보지 말 것을….

운동에 지친 몸을 눕히면 천장이 내려앉았고, 구석에서 거미가 나와 천장이 거미줄로 뒤덮이는 환각 증세에 시달리며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세계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집 나간 어머니도 돌아오시고, 아버지 병도 나아지고, 미국에서 고생하는 언니도 불러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상을 지켜야 하는 부담감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물도 못 삼킬 정도로 수면제를 먹었다. 위장이 약으로 가득 차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낮에 보았던 화려한 개나리의 노란색이 눈에 스쳤다. 갑자기 억울했다.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게 살아야 했다는 것이….”

결국 김주희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했고,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친구는 119에 신고해, 구조대원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집안 한편에 있는 챔피언 벨트를 본 구조대원들은 생활고에 삶을 포기한 세계 챔프를 안타까워하며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깨어난 김주희는 반나절을 쉬지 않고 울었다고 한다. 질책 대신 “주희야, 그렇게 힘들었니?”라고 되뇌던 스승의 나지막한 울먹임에 더욱 서럽기만 했다.

극소수 주변인들만 알고 넘어간 자살 기도 후유증은 컸다. 위장은 망가져 소화 기능을 상실했고, 당연히 기력은 바닥. 김주희는 산을 다니며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우울증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때 김주희에게 남동생이 생겼다. 사람 크기의 곰 인형이다. 이름은 김주만. 정 관장께 사달라고 부탁했고, 이름도 스승이 지어줬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 방을 온종일 지킨다. 밤 12시 훈련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 불을 켜면, 우두커니 주만이 앉아 있다. 주희는 주만에게 주절주절 말을 붙인다. 물론 대답이 없지만 외로움은 많이 가셨다.

힘든 경기를 마치고 링에서 내려오면 위로해주는 피붙이 한 명 없었다. 홀로 아파트에 돌아와 피와 땀에 얼룩진 옷을 빨면 외로움이 조금은 가신다. 익숙한 상황이다.

화제를 바꿔보자. “남자친구는 있나?”

“술과 연애는 은퇴 뒤에 하기로 했다. 남들처럼 즐기면 챔피언은 가능하지 않다. 권투는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운동이다. 안 때리면 내가 맞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종목이다. 물론 남자는 사귀고 싶다. 아직 나 같은 ‘매서운 주먹’을 가진 여자를 좋아할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자기가 하는 일에 스스로 감동 받아야
한달 3~5회 강연하며 박사학위 도전
WBC 타이틀 획득하는게 마지막 목표

김주희는 절약과 저축이 몸에 배어 있다. 상상 초월 ‘짠순이’다.

김주희는 체육관 근처 대형마트 입구에 비가 오는 날에는 한 두번 간다. 그러곤 카트를 정리한다. 카트 이용료 100원을 빼는 것이 귀찮아 그냥 놓고 가버린 카트를 정리하다 보면 몇천원은 쉽게 모은다. 주머니에 항상 10원짜리 동전이 몇개 있다. 길거리 공중전화를 살펴보다 70원이 남아 있으면 30원을 넣고 반환하면 100원짜리 동전이 나온다.

저금통도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가 따로 있다. 동전을 알뜰히 모아 전기료 등 공과금을 낸다. 생활비 나가는 통장, 대전료 들어오는 통장 등 종류별로 통장도 구분해 쓴다. 어릴 때 돈이 없어 걸어다닌 것이 버릇이 돼 버스 네다섯 정거장은 걸어다닌다. “중학교 때 교복을 가방에 넣고 버스를 탔다. 어린이 요금 내면 200원이 절약됐다. 버스에 내려 교문 근처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김주희는 인기 강사다. 한달에 20~30건씩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운동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3~5번은 한다. 강사료도 비싸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당신 강연의 핵심은?”

“자기가 하는 일에 스스로 감동을 받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오른 것과, 한쪽 엄지발가락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지만 재활에 성공한 것에 감동한다. 스스로 감동을 하기 위해선 정말 노력해야 한다.”

내공이 넘친다. 김주희는 어릴 때부터 삼국지를 50번 이상 읽은 독서광이다. 지금도 한달에 새로 나온 책 5권 정도는 꼭 읽는다. 그런 김주희를 만든 이는 스승이다. 김주희를 권투에 입문시켰고, 지금까지 친딸처럼 돌봐주고 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비도 대주었고, 다달이 성적표를 갖고 오게 해 공부도 시켰다.(김주희는 초등학교 때까지 전 과목 백점을 맞는 우등생이었다.) 삼국지와 함께 육군 군사작전 교본을 읽게 해 전술 전략을 몸에 익히도록 했다.

그런 스승을 설명하던 김주희의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이제 몸도 예전 같지 않으시고, 특히 치아가 많이 약해지셨다. 지난 세월 힘을 다해 내지르는 내 주먹을 받아주시느라 그렇게 됐다. 감량할 때는 같이 굶으셨다. 스승님 치아는 내가 꼭 고쳐드릴 것이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까. 나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 관장은 매일 아침 체육관 한편에 있는 김주희의 챔피언 벨트를 정성껏 닦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딸 같은, 아니 딸보다 애착이 더 가는 김주희의 피와 땀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른 선수에게 넘겨줘야 한다.

중부대학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주희는 일본 선수가 갖고 있는 세계권투평의회(WBC) 타이틀을 마지막 목표로 하고 있다. 전무후무할 한 체급 8개 기구 통합 챔피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선수는 대전을 피하고 있어 언제 성사될지는 모른다. 여성 복서 가운데 사상 첫 현역 박사도 그의 몫이다.

집 근처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드린 아버지는 요즘 면회 온 김주희를 미국에 있는 언니로 가끔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동네 슈퍼에서 300원짜리 크림빵을 훔쳐 먹다가 빵 부피보다 더 많이 눈물을 쏟으며 울었던 김주희는 좌절하지 않는다.

“먹구름이 걷히면 햇살이 더욱 반가운 것처럼, 슬픈 날이 지나면 즐거운 날들은 더욱더 값지게 느껴지죠.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 결실이 맺힙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인터뷰·사진/ 이길우 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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