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청구해서 우리가 도심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꼭 밝히고 싶어요.” 용산참사와 관련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3년9개월을 살다 지난해 10월 출소한 김재호씨는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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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서 딸에게 눈물의 그림편지…‘도심 테러리스트’ 누명 벗고파”
[한겨레가 만난 사람] ‘용산참사’ 옥살이 마친 철거민 김재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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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라면 끓여 먹는 법 등
1345일간 400여통 편지 모아
‘꽃피는 용산’ 책으로 펴내 -참사 당시 권력층에서는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정치가들의 놀음에 우리가 놀아난 것 같아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막 취임한 김석기(당시 서울경찰청장)가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과잉충성도 있었겠죠.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촛불집회에서 덴 것도 있을 테고요. 아무튼 망루로 올라간 지 하루도 못 돼 진압작전이 펼쳐졌어요. 건설사, 조합 불러서 협상을 하도록 했으면 쉽게 풀렸을 텐데….” -화염병도 준비할 정도로 결사적인 태도였는데…. “용역들이 엄청났어요. 계단에다 타이어 태우고 그랬어요. 그래서 용역들 못 들어오게 화염병 던졌어요. 시민들에게는 절대 안 던졌어요. 용역들에게 1~2개 던졌을 뿐이에요. 망루에 올라갔는데 용역이나 경찰이 들어온다고 순순히 내려가면 차라리 안 올라간 것만 못하죠. (경찰당국이) 위험성 있어서 안 되겠다고 보길 바랐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죠.” -당시 요구사항은 무엇이었나요? “장사할 수 있도록 임대상가나 임대주택이라도 지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조합 쪽에서는 2~3년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자기들이 평가한 금액을 받고 나가라는 것이었어요. 가게 쑥 둘러보고 세금 낸 것을 토대로 멋대로 평가금액을 매긴 것이죠. 군대 갔다 와서 몇년간 갖은 고생 하며 기술을 익혀서 1984년에 5~6평짜리 금은방(진보당)을 개업했습니다. 조합 쪽에서는 영업보상비 4천만원, 가게 평가금액 1천만원 남짓만 제시했어요. 가게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살림집은 이사비용 정도만 받았어요. 2층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용역이 비어 있는 밑의 집을 마구 부수어 깜짝 놀랐어요. ‘이래도 안 나갈래’ 하면서 위협을 가한 거죠. 그래서 장롱 등 살림살이를 다 놓고 나왔어요.” 검찰, 4층서 화염병 던졌다지만
우리가 뛰어내린뒤 4층 불붙어
제일 억울한 건 살인죄 옥살이
빨리 재심 청구해 진실 밝혔으면 -망루에 올라가는 것 이외에는 선택이 없었나요? “다른 지역에 간다고 해도 장사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권리금 1억~2억원 정도를 안 주고는 갈 데도 없고요. 그래서 우리 힘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서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에 들어갔어요. 그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데 사실 별거 아니에요. 전국 각 지역에서 철거된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 모두 쫓겨나서 악만 남아서 조금 과격해진 것뿐이에요. 다른 지역 철거문제 해결에 7~8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용산 지역이 굉장히 드센 지역이어요. 지역 깡패들이 아주 유명해요. 그들이 조합에 붙어서 괴롭히는 거예요. 한집 쫓아내면 얼마씩 받고 그랬죠. 도저히 견딜 방법이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시내니까 보기 싫어서라도 빨리 해결해줄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올라갔어요.” 그는 금은방을 개업할 때 현찰을 내고 권리금을 준 것은 아니지만 가게 주인을 위해 6~7년간을 무보수로 일을 해준 뒤 가게를 인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금액이 1억원은 넘으니까 그게 나한테는 권리금 같은 거죠.” 김씨는 서울 아현동 철거지역으로 연대투쟁을 갔는데 그 지역에서도 용산에서 활동하던 용역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철거민들이 두들겨 맞아도 경찰이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는 현실을 목격했다. “갈비뼈 2~3대 부러져 6주 진단서로 경찰 조사과에 가서 고소장 제출했는데 ‘그냥 해결 봐라. 갈비뼈 2~3대는 병원에서 그냥 떼준다’고 그래요. 돈 있는 자본가에게는 납작 엎드리고, 철거민들이 용역 때려 다쳤다고 하면 바로 벌금이 나와요. 세상이 잘못된 거죠.”
철거민 김재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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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씨의 은 기성작가의 만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성과 그림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호씨가 딸에게 보낸 실제 편지들(오른쪽).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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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조합 불러 협상했으면
쉽게 풀렸을 일이 참극으로 번져
우리가 정치놀음에 놀아난 거 같아 -부인한테 평소 잘하셨나 봐요? “편지에도 썼지만 지금은 어딜 가도 계속 손잡고 다녀요. 자연적으로 으레 따라가요. 아내하고 띠동갑이라 저한테 화가 나서 싫은 소리 해도 저는 반응을 안 하고 나중에 풀어주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니까 집안이 편하더군요.” -수감 생활 중 딸이 정신병원 치료도 했다면서요? “혼자 집에 있다 보니까 우울증 증상이 나서 갑자기 짜증 내고 울고 그랬어요. 1~2년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딸한테 그림편지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효과가 있었죠. 처음엔 그냥 빡빡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잘 안 읽는 것 같았어요. 처가 ‘읽지도 않고 처박아 놓는다’고 해서 글씨를 써넣고 그 빈자리에 한칸씩 웃을 수 있는 그림을 덧붙여서 보내줬더니 딸아이가 그림편지로 답장이 왔어요. 그리고 더 많이 그려 달라는 거예요. ‘아 역시 만화다’라고 생각해 그때부터 편지는 안 썼어요. 대신 24칸짜리 만화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렸죠. 혼자 생활해야 하는데 버스 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 없을 때 라면 끓여 먹는 법, 방 청소하는 법 등을 담아 보냈죠. 그런데 아내가 혜연이가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안 하던 방청소 하고….” -늦게 본 딸이라 그런지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한번 유산한 뒤 마흔셋에 낳은 딸이라, 감옥에 들어가니 자나 깨나 걱정이 됐어요. 아내가 여행사 다니다 보니까 제가 키웠거든요. 엄마를 밀어낼 정도로 저를 따랐어요.” 감옥에서 나와 보니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딸은 아빠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주지 않는다고 김씨는 안타까워했다. “아직까지 아빠의 빈자리가 커요. 지금도 가까이 가려고 하면 ‘아빠, 문 닫고 나가’라고 해요. 혼자 있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그런가 봐요. 한참 방향을 잡아줄 나이에 잡아주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전철연’은 철거된 사람들 모임
쫓겨나 악에 받쳐 과격해진 것
가게 권리금 상한선 결정 등
세입자법 통과돼야 비극 재발안해 -교도소 안에서 그림 그리는 도구도 마땅치 않았을 텐데요. “서울교도소에서는 A4 용지를 팔았어요. 아이라서 그런지 컬러그림을 좋아하더라고요. 10가지 색깔이 나오는 향기펜을 교도소 안에서 사서 그렸는데 펜촉이 가늘어서 일일이 배경을 그리는 게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항상 그림을 그리니까 시간이 잘 갔죠. 이것 아니었으면 시간이 안 지나갔을 거예요.” -따로 만화 공부하셨나요? “전혀 안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미술시간에 항상 100점 맞았어요. 군대에서는 차트병으로 탱크를 그리곤 했지요. 사회 나와서는 초상화를 심심풀이로 그렸어요. 꿈은 야외 나가서 그림 그리는 것이었는데 먹고살기 바빠서 제대로 그리지 못했어요.”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초의 여성대통령이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생각하는 게 다를 수도 있어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명박 정권에서 갈라져 나와서 신뢰성이 안 갑니다. 이명박처럼 악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힘들 것 같아요. 야당이 두번 집권해야 되지 않을까 해요. 재심은 청구할 수 있지만 야당이 정권 잡아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 생활은 어떤가요? “기술은 다 가지고 있지만 할 만한 곳이 없어요. 금은방은 단골 장사인데 단골 다 떨어져나갔고 도매상은 근처에 있고 해서 가게 차린다고 잘된다는 보장은 없고 또 권리금도 많이 달라고 해서요. 지금은 쉬려고 해요.” 2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내내 ‘배제되고 갇혀 있던 자의 분노’보다는 순백의 가족사랑을 보여준 그의 모습에서 ‘비정한 시대’를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대한민국 서민의 삶이 그대로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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