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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7 19:36 수정 : 2013.02.18 15:36

“재심 청구해서 우리가 도심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꼭 밝히고 싶어요.” 용산참사와 관련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3년9개월을 살다 지난해 10월 출소한 김재호씨는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감옥서 딸에게 눈물의 그림편지…‘도심 테러리스트’ 누명 벗고파”
[한겨레가 만난 사람] ‘용산참사’ 옥살이 마친 철거민 김재호씨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25일이면 이명박 정권의 5년 집권이 끝나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다. 이명박 정권 때 대형 사건이 아주 많았고 그 평가는 보기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겠지만, 용산참사만큼 비극적인 사례도 드물다.

건설사 사장 출신인 이명박 정권은 도심 재개발의 광풍 속에 생계대책을 요구하며 망루에 올라간 상가 세입자들에 대해 단 하루 만에 대규모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벌이는 것으로 재빨리 응답했다. 그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경찰 1명을 포함해서 6명이 숨졌다. 망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상죄를 뒤집어쓰고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3년9개월~4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용산 재개발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는 일본의 롯폰기힐스 재개발 사업(1986~2003년) 사례에 비춰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용산 재개발과 비슷한 도심 재개발 사업인 롯폰기힐스 17년간의 사업기간 중 조합 쪽이 주민설명회를 1천여차례 주최했고, 행정당국도 90%가 넘는 조합가입률도 부족하다며 조합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특별사면을 하면서 용산참사 관련자(전국철거민연합 관련자 1명 제외)를 풀어주며 치욕스러운 흔적을 지우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 측근비리 수감자들의 석방을 위한 끼워넣기에 활용함으로써 이 비극적인 사건과의 최소한의 화해도 이루지 못한 채 집권을 마감하게 됐다. 용산참사의 상징인 남일당 터는 4년이 넘도록 주차장으로 텅 빈 공터로 남아 있다.

가장 먼저 구속돼 지난해 10월 가석방된 용산4지구 철거대책위 조직부장이었던 김재호(57)씨는 남일당 앞에서 25년간 금은방(진보당)을 운영하며 그저 먹고살기 바쁜 소시민이었으나 남일당에 올라간 뒤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철거 현장을 지날 때마다 ‘저 사람들 왜 저러지’ 하면서 불구경하듯 지나쳤고, 텔레비전 뉴스도 안 보던 사람이었다. 4년형을 선고받고 영어의 몸이 된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억울함보다는 마흔셋에 낳은 외동딸이 아빠의 부재중 잘 자랄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3년9개월 만에 가석방된 이후 그의 최대 관심사도 불확실한 생계 문제보다는 딸과의 거리 좁히기이다.

지난달 용산사태 4주기를 앞두고 나온 그림편지 모음집 <꽃피는 용산>(서해문집 펴냄)은 옥에 갇힌 딸바보 아빠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혼자 있을 딸을 위해 혼자 라면 끓여 먹는 법, 청소하기 등 그림편지 400여통이 김씨의 1345일 수감 생활을 증언한다.

지난달 29일 만난 김씨는 남일당 망루에 올라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것밖에 선택이 없었다”면서도 “딸을 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착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꽃피는 용산>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많이 배웠다는 무기로 높은 자리 꿰차고 앉아 한마디 말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들이야말로 가정 파괴범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처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을 생이별시켜 놓았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가정 파괴범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인터뷰/ 김도형 기획위원 aip209@hani.co.kr

[관련 영상] ‘딸 바보’ 테러리스트

-용산참사 관련자 특사 소감은?

“가장 빨리 구속돼서 지난해 가석방으로 먼저 나와서 그런지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데 제 입장에서는 사면돼서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다. 끼워넣기 특사여서 기분은 나쁘지만요.”

-검찰 기소 내용과 법원 판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가요?

“그렇죠. 검찰은 4층에 있던 철거민이 3층에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다고 몰고 갔는데 저희는 인정하지 않죠. 화염병은 4층에 있었지만 경찰이 막 들어왔을 때 통로도 좁고 사람도 올라오고 던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진상은?

“불이 나서 밑으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나올 때는 불보다는 최루액 때문이었어요. 매워서 숨을 쉬지 못할 정도여서 망루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밀고 밑을 내다봤으나 불이 나지 않았어요. 검은 연기가 어디서 슬슬 났는데 아래서 ‘뛰어’ 하는 소리가 났어요. 검찰의 주장대로 3층에서 불이 났다면 신나(시너)로 인해 확 불이 붙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어요. 뛰어내리고 1~2분 있다가 불이 났어요. 그런 것을 볼 때 불은 4층에서 먼저 나서 3층과 동시에 불이 붙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검찰의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 것입니다. 경찰이 3층에 있었는데 4층에서 3층으로 화염병 던졌다면 경찰이 1명밖에 안 죽었겠어요?”

아빠 없이 지낼 외동딸 위해
혼자 라면 끓여 먹는 법 등
1345일간 400여통 편지 모아
‘꽃피는 용산’ 책으로 펴내

-참사 당시 권력층에서는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정치가들의 놀음에 우리가 놀아난 것 같아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막 취임한 김석기(당시 서울경찰청장)가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과잉충성도 있었겠죠.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촛불집회에서 덴 것도 있을 테고요. 아무튼 망루로 올라간 지 하루도 못 돼 진압작전이 펼쳐졌어요. 건설사, 조합 불러서 협상을 하도록 했으면 쉽게 풀렸을 텐데….”

-화염병도 준비할 정도로 결사적인 태도였는데….

“용역들이 엄청났어요. 계단에다 타이어 태우고 그랬어요. 그래서 용역들 못 들어오게 화염병 던졌어요. 시민들에게는 절대 안 던졌어요. 용역들에게 1~2개 던졌을 뿐이에요. 망루에 올라갔는데 용역이나 경찰이 들어온다고 순순히 내려가면 차라리 안 올라간 것만 못하죠. (경찰당국이) 위험성 있어서 안 되겠다고 보길 바랐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죠.”

-당시 요구사항은 무엇이었나요?

“장사할 수 있도록 임대상가나 임대주택이라도 지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조합 쪽에서는 2~3년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자기들이 평가한 금액을 받고 나가라는 것이었어요. 가게 쑥 둘러보고 세금 낸 것을 토대로 멋대로 평가금액을 매긴 것이죠. 군대 갔다 와서 몇년간 갖은 고생 하며 기술을 익혀서 1984년에 5~6평짜리 금은방(진보당)을 개업했습니다. 조합 쪽에서는 영업보상비 4천만원, 가게 평가금액 1천만원 남짓만 제시했어요. 가게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살림집은 이사비용 정도만 받았어요. 2층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용역이 비어 있는 밑의 집을 마구 부수어 깜짝 놀랐어요. ‘이래도 안 나갈래’ 하면서 위협을 가한 거죠. 그래서 장롱 등 살림살이를 다 놓고 나왔어요.”

검찰, 4층서 화염병 던졌다지만
우리가 뛰어내린뒤 4층 불붙어
제일 억울한 건 살인죄 옥살이
빨리 재심 청구해 진실 밝혔으면

-망루에 올라가는 것 이외에는 선택이 없었나요?

“다른 지역에 간다고 해도 장사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권리금 1억~2억원 정도를 안 주고는 갈 데도 없고요. 그래서 우리 힘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서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에 들어갔어요. 그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데 사실 별거 아니에요. 전국 각 지역에서 철거된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 모두 쫓겨나서 악만 남아서 조금 과격해진 것뿐이에요. 다른 지역 철거문제 해결에 7~8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용산 지역이 굉장히 드센 지역이어요. 지역 깡패들이 아주 유명해요. 그들이 조합에 붙어서 괴롭히는 거예요. 한집 쫓아내면 얼마씩 받고 그랬죠. 도저히 견딜 방법이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시내니까 보기 싫어서라도 빨리 해결해줄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올라갔어요.”

그는 금은방을 개업할 때 현찰을 내고 권리금을 준 것은 아니지만 가게 주인을 위해 6~7년간을 무보수로 일을 해준 뒤 가게를 인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금액이 1억원은 넘으니까 그게 나한테는 권리금 같은 거죠.”

김씨는 서울 아현동 철거지역으로 연대투쟁을 갔는데 그 지역에서도 용산에서 활동하던 용역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철거민들이 두들겨 맞아도 경찰이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는 현실을 목격했다. “갈비뼈 2~3대 부러져 6주 진단서로 경찰 조사과에 가서 고소장 제출했는데 ‘그냥 해결 봐라. 갈비뼈 2~3대는 병원에서 그냥 떼준다’고 그래요. 돈 있는 자본가에게는 납작 엎드리고, 철거민들이 용역 때려 다쳤다고 하면 바로 벌금이 나와요. 세상이 잘못된 거죠.”

철거민 김재호씨
-용산참사 이후 정치권에서 법을 바꾸겠다고 논의는 무성했지만 결국 관련 법 개정이 안 됐습니다.

“국회에 상정은 돼 있다고 하는데 통과가 안 되면 무용지물이잖아요. 결국 세입자 관련 법이 바뀌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용산사태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요. 세입자 상인들에게 권리금 등 본인들이 충족할 수 있는 액수를 말이죠. 그렇다고 과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상한선을 정하면 용산참사 같은 일이 안 일어날 것입니다.”

-억울함도 많았겠어요?

“저희는 제일 억울한 것은 살인죄로 옥살이한 것인데 빨리 재심 청구해서 ‘사람 죽인 일 없다. 우연히 불이 난 것이지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고 싶어요.”

-남일당 터가 공터로 남아 있는데….

“철거민을 죽이기까지 해서 부숴버리고, 몇년 을 내버려둘 바에야 왜 그렇게 급하게 처리했느냐는 말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적 놀음에 우리가 놀아난 거예요. 이명박 정권의 최대 오점을 남긴 것이죠. 웃기는 일은 용산사태를 맡은 김석기 당시 서울청장을 비롯해서 검사나 판사가 승진되거나 모두 잘됐다는 거야. 뭔가 잘못된 거죠.”

김재호씨의 은 기성작가의 만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성과 그림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호씨가 딸에게 보낸 실제 편지들(오른쪽). 서해문집 제공

-부인이 힘들어했을 것 같은데요.

“아내가 접견 와서 ‘돌아가신 분도 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하고, 가석방에 떨어져 속상해하고 있을 때도 ‘지금까지도 참았는데 몇개월 못 참느냐’고 격려해서 힘이 됐죠.(웃음) 그리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딸 돌보며 노래방 가게를 차려서 생계 꾸리는 것을 보면 대단해요. 감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행사를 다녔는데 거기에 들어간 뒤 딸아이가 무섭다고 아내한테 자꾸 전화하거나 울고 있는 사진을 보내고 그래서 직장 일을 그만뒀어요.”

수감 기간 중 노래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진 김씨의 아내는 출소 뒤 그에게 “생계 걱정하지 말고 용산을 위해 좋은 일은 적극 하라”고 격려하고 있다고 한다.

망루 올라간 지 하루도 못돼 진압
건설사·조합 불러 협상했으면
쉽게 풀렸을 일이 참극으로 번져
우리가 정치놀음에 놀아난 거 같아

-부인한테 평소 잘하셨나 봐요?

“편지에도 썼지만 지금은 어딜 가도 계속 손잡고 다녀요. 자연적으로 으레 따라가요. 아내하고 띠동갑이라 저한테 화가 나서 싫은 소리 해도 저는 반응을 안 하고 나중에 풀어주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니까 집안이 편하더군요.”

-수감 생활 중 딸이 정신병원 치료도 했다면서요?

“혼자 집에 있다 보니까 우울증 증상이 나서 갑자기 짜증 내고 울고 그랬어요. 1~2년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딸한테 그림편지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효과가 있었죠. 처음엔 그냥 빡빡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잘 안 읽는 것 같았어요. 처가 ‘읽지도 않고 처박아 놓는다’고 해서 글씨를 써넣고 그 빈자리에 한칸씩 웃을 수 있는 그림을 덧붙여서 보내줬더니 딸아이가 그림편지로 답장이 왔어요. 그리고 더 많이 그려 달라는 거예요. ‘아 역시 만화다’라고 생각해 그때부터 편지는 안 썼어요. 대신 24칸짜리 만화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렸죠. 혼자 생활해야 하는데 버스 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 없을 때 라면 끓여 먹는 법, 방 청소하는 법 등을 담아 보냈죠. 그런데 아내가 혜연이가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안 하던 방청소 하고….”

-늦게 본 딸이라 그런지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한번 유산한 뒤 마흔셋에 낳은 딸이라, 감옥에 들어가니 자나 깨나 걱정이 됐어요. 아내가 여행사 다니다 보니까 제가 키웠거든요. 엄마를 밀어낼 정도로 저를 따랐어요.”

감옥에서 나와 보니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딸은 아빠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주지 않는다고 김씨는 안타까워했다. “아직까지 아빠의 빈자리가 커요. 지금도 가까이 가려고 하면 ‘아빠, 문 닫고 나가’라고 해요. 혼자 있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그런가 봐요. 한참 방향을 잡아줄 나이에 잡아주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전철연’은 철거된 사람들 모임
쫓겨나 악에 받쳐 과격해진 것
가게 권리금 상한선 결정 등
세입자법 통과돼야 비극 재발안해

-교도소 안에서 그림 그리는 도구도 마땅치 않았을 텐데요.

“서울교도소에서는 A4 용지를 팔았어요. 아이라서 그런지 컬러그림을 좋아하더라고요. 10가지 색깔이 나오는 향기펜을 교도소 안에서 사서 그렸는데 펜촉이 가늘어서 일일이 배경을 그리는 게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항상 그림을 그리니까 시간이 잘 갔죠. 이것 아니었으면 시간이 안 지나갔을 거예요.”

-따로 만화 공부하셨나요?

“전혀 안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미술시간에 항상 100점 맞았어요. 군대에서는 차트병으로 탱크를 그리곤 했지요. 사회 나와서는 초상화를 심심풀이로 그렸어요. 꿈은 야외 나가서 그림 그리는 것이었는데 먹고살기 바빠서 제대로 그리지 못했어요.”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초의 여성대통령이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생각하는 게 다를 수도 있어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명박 정권에서 갈라져 나와서 신뢰성이 안 갑니다. 이명박처럼 악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힘들 것 같아요. 야당이 두번 집권해야 되지 않을까 해요. 재심은 청구할 수 있지만 야당이 정권 잡아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 생활은 어떤가요?

“기술은 다 가지고 있지만 할 만한 곳이 없어요. 금은방은 단골 장사인데 단골 다 떨어져나갔고 도매상은 근처에 있고 해서 가게 차린다고 잘된다는 보장은 없고 또 권리금도 많이 달라고 해서요. 지금은 쉬려고 해요.”

2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내내 ‘배제되고 갇혀 있던 자의 분노’보다는 순백의 가족사랑을 보여준 그의 모습에서 ‘비정한 시대’를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대한민국 서민의 삶이 그대로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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