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서강대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유시찬 신부는 4월24일 인터뷰에서 “종교적 외피는 없지만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종교적 차원에 도달한 것”이라며, 기성 종교가 고정된 틀을 깨고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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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만난 사람]
‘나는 지금…’ 에세이집 펴낸
전 서강대 이사장 유시찬 신부
마음의 스펙 쌓아갈 필요 # 5년 동안 개신교 신자였던 그를 가톨릭으로 이끈 이는 이해인 수녀였다. 당시 법원의 5급 행정직 간부였던 유 신부는 부하직원이 근무 중 보고 있던 이해인 수녀의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영혼의 상태가 새까맣다면 그 시집의 영혼은 새하얬다고 할까요.” 87년 2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그의 열망이었던 판사직에 대한 회의와 맞물렸다. 가톨릭 신자로서 그는 같은 해 신부·수녀들의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관할 법원장의 질책과 인사 불이익이 이어졌다. “법관이 돼 권력이랄까 중앙으로 들어가는 것, 사법시험 치는 것이 무슨 의미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88년 원주법원 시절 성소(신학교나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를 받았다. “지원서에 만년필로 에이4 10장이 넘도록 빼곡하게 내 영혼의 상태를 적었어요. 태어나서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 그는 지금 경기 양평 양수리의 임시거처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내년 4월 이후엔 순천 예수회 영성센터에서 피정 지도 신부의 소임을 하게 된다. 지난 4월24일 양수리에서 기자와 만난 유 신부는 여러차례 ‘틀을 깨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존경하는, 한국으로 귀화한 미국인 정일우 신부를 떠올릴 때도 그랬다. 빈민운동에 헌신해온 정 신부는 현재 투병 중이다. “(신부가 된 뒤) 영신수련 피정 중인데, 정 신부께서 육개장을 통째로 마시고 계셨어요. 평소 공동체 활동 때도 자유분방한 모습이었죠.” 유 신부에게 예수도 “계속 틀을 깨부수는 분”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을 떠올렸다. “애초 계획에는 없었는데, 주변의 권유에 응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제게 비쳤습니다. 라틴어로 ‘힉 엣 눙크’(hic et nunc)란 말이 있죠. ‘지금 이 자리에서’란 뜻입니다.” 고정된 틀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땅의 종교는 너무나 튼실한 틀에 묶인 것처럼 보인다. “머리 차원에서 종교 생활이 너무 많아요. 존재의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본래 추구했던 삶의 변화, 사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나도 판사 되려 사시 매달렸지만
지금 보면 남의 생각에 날 맞춘것 세상을 보면 종교가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는 생각도 든다. 유 신부는 답했다. “예수, 석가, 공자, 왕양명 선생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칼부림이 일어날까요. 어림 턱도 없죠. 얼마나 재밌게 통하면서 말을 잘할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각자 종교의 본래적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라는 틀을 깨고,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가톨릭만 해도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이 설 자리 없다, 이런 말 많이 들어요.” 명나라 유학자인 왕양명의 학문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주자학이 우주, 인간, 자연을 포괄하는 방대한 체계를 세우려 했다면, 왕양명 선생은 틀이나 체계보다는 그때그때 살아 움직이는 마음에 모든 것이 담겨 있고 그 마음을 바르게 보존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죠. 행하지 않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봤죠. 왕 선생이 말하는 양지는 모든 것을 분별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주는데, 이게 가톨릭적으로 성령이죠.” 이는 중(中)에 대한 사유와 닿는다. “중 앞에 때 시(時)를 붙여 시중이라 하죠. 시는 지금 이 자리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어떻게 중을 취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중의 이치를 알아듣고 삶 속에서 실현하려 하면 생명 보존이나 환경 문제가 근본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생명체가 생명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서 있을 수 있는 조건, 그게 중입니다.” # 유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예수회 소속이다. 그가 예수회를 택한 데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작용했다. 가톨릭 성인전 두 권을 훑은 뒤 세례명 ‘보나벤뚜라’를 택했다. 프란치스코회 3대 총원장을 지낸 보나벤뚜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버금가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새 교황에 대한 바람이 궁금했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죠. 우리 사회도 그렇고 양극화가 너무 심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힘없는 사람, 죄인,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어 움직인 것처럼, 교회 권력이 세진 것에 대한 회심이 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다르지만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이런 의식이 너무 약합니다. 성직자부터 대대적으로 회심해야 합니다.” 예수도 계속 틀을 깨부수는 분
지금 자리에서 깨어있는 게 중요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는 ‘종교는 망상’이라고 했다. 그들로부터 어떻게 종교를 지켜낼 수 있을까. “(종교성은) 지성과 이성을 내포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죠. 노자는 ‘도를 도라고 할 때 그건 본래의 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도의 개념이 종교성이 아닌가 싶어요. 절대자와의 만남이 이 경지입니다. 이걸 교리로 만들어 뒤집어씌우니 똑똑한 사람들이 망상이라고 하죠. 종교적 외피는 없지만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종교적 차원에 도달한 것이죠. 무신론자들도 이런 의미의 종교성에는 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좀더 쉽고 구체적으로 풀었다. “(종교성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생명 소중하게 여기고, 함께 걸어갈 줄 알고, 다른 사람 아프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아프면 함께 아파할 줄 알고.”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게을러”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종교인에게 책읽기란 무엇인가. “성철 스님, 후배들에게 절대 책 읽지 말라고 했죠. 선종도 불립문자라고, 책 같은 거 금기시했죠. 그 말 맞다 싶기도 합니다. 아예 책 안 보고 깨달음의 길 가는 것 그것도 하나의 방편이죠. 그릇이 큰 경우입니다. 하수는 어느 정도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을 통한) 앎의 내용이 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마리 구실이 되어야 합니다. 앎이 머리의 앎이 아니라 뱃속의 앎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큰 변화가 생깁니다. 그런 차원에서 어느 정도 (책읽기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겠다 생각합니다.” 계획을 물었다. “솔직히 (신부들이) 맑게 깨어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길을 비출 수 있는 그런 역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도저히 말 못하겠어요. 신부님 수녀님들 가운데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력하려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많이 나오면, 그들이 신자나 일반 사람들을 이끌 수 있겠죠.” 단서가 달렸다. “내 그릇이 갖춰져야 하는데 여기서 자신이 없어요….” # 신부의 새하얀 머리카락에서 영혼의 상태를 떠올릴 이들이 제법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수녀님의 시집에서 받았던 그 느낌처럼. 인터뷰/강성만 기획에디터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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