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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로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한 박경완 에스케이(SK) 2군 감독이 지난달 21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그동안 동고동락해왔던 ‘보물’ 포수 마스크를 가슴에 안고 밝게 웃고 있다. 인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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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만난 사람] 박경완 프로야구 SK 2군 감독
수비를 잘하는 포수는 많아도 공격과 수비를 모두 잘하는 포수는 드물다. 박경완(42)은 이만수 에스케이 감독 이후 공수를 겸비한 ‘완성형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현역 시절 근성으로 똘똘 뭉친 그는 조범현과 김성근 감독을 만나면서 재능을 꽃피웠다.
쌍방울(1991~1997년), 현대(1998~2002년)를 거쳐 에스케이(2003~2013년)에서 23년간 선수 생활을 하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새로 써내려갔다. 1994년부터 주전 포수로 팀을 이끌었고 그해 도루 저지율 0.433으로 1위를 기록했다. 프로야구 통산 2043경기(통산 5위)에 출장해 타율 0.249, 홈런 314개(통산 5위), 995타점을 기록했다. 2000년 국내 최초 4연타석 홈런과 2001년 포수 최초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박경완은 선수 생활 23년 동안 세 차례 아킬레스건 수술과 두 차례 무릎 수술을 받았다. 2011년 다섯번째 수술 이후 그의 모습을 그라운드에서 자주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10월23일 공식 은퇴와 동시에 코치 경험도 없이 에스케이(SK) 2군 감독에 선임되는 파격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박 감독은 올해부터 10구단으로 2015년 1군 리그에 진입하는 조범현 케이티 감독,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과 프로야구 2군(퓨처스) 리그에서 사제 대결을 벌여야 한다. 감독이 된 지 석달째를 맞아 지난달 21일 인천 문학구장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야구장은 시험대에 선 초보 감독 박경완이 헤쳐가야 할 ‘상징’처럼 다가왔다.
-지난해 10월23일 감독에 선임된 뒤 3개월이 지났다. 느낀 점이 많을 것 같다.
“선수 때는 스케줄을 받아서 했고 지금은 스케줄을 내야 하는 입장이다. 선수로서 해야 될 일이 뭔지를 생각했다면 이젠 선수를 가르치는 반대 입장이다. 어느 정도 적응됐지만 새로운 걸 생각해내야 하고 효율적인 지도 방법도 찾아야 한다.”
-코치를 거치지 않고 감독으로 선임됐다. 어려운 점은 없나?
“가르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초보라서 미숙하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선수들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되니 책임감을 느낀다.”
-어떤 부분에 가장 주안점을 둘 것인가?
“기본기를 철저히 할 것이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 쉽게 무너진다. 지금까지 선수 경험에 비춰보니 많이 한 놈이 이기더라. 내 스타일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상황과 실력에 맞춰 나가겠다. 70 정도 실력인 선수는 75로 올리고, 80 정도면 90으로 차근차근 쌓아가면 된다.”
-구단의 감독 제의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당황했다. 경험도 없고. 바로 수락을 못 하겠더라.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가 발표 나기 1주일 전쯤 수락했다.”
-선수 은퇴는 언제부터 생각했나?
“2006년 말 기량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도 했고, 마침 그때 김성근 감독이 에스케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훈련량이 너무 많다 보니 두렵더라. 24살(1996년) 때 쌍방울에서 김 감독을 처음 만났는데 20대 초반에 만나고 30대 중반에 또 만나니 두렵기도 해 은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서 도망가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돼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덤볐다. 해보니 되더라. 은퇴라는 단어가 쏙 들어가 버렸다.
두번째는 2011년에 5번째 수술 하고 ‘이 몸 가지고 되겠나’ 싶었다. 2012년 10경기 정도 뛰고 7월에 2군으로 떨어져서 진짜 시기가 온 것 같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끝내는 게 용납이 안 됐다. 구단에서 처음으로 은퇴 얘기가 나왔고, ‘1년만 더 해보겠다’고 하니 구단에서 받아들였다. 결국 지난해 7월에 ‘여기서 더 버티면 안 되겠다, 너무 추해지겠다’ 싶어 결심했다.
중간에 발표할까 어쩔까 하다가 공식적으로는 못하고 내가 먼저 암암리에 은퇴 얘기를 했다. 시즌 끝나고 미국이나 일본 쪽 야구 유학도 많이 생각했다. 유소년 쪽 관심도 있어 고민하고 있는데 구단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
-야구 스승인 김성근, 조범현 감독과 퓨처스(2군)리그에서 만나는데, 각오는?
“승부는 냉정하다. 야구장에는 이기려고 간다. 그렇게 배웠다.”
-감독으로서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목표는?
“홈런왕과 최우수선수가 됐을 때가 가장 후회스러웠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만족을 하는 순간 떨어진다.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 위를 보고 도전해야 한다. 도전 정신이 필요하지 목표는 없다. 그래프에 수치가 100%까지만 그려져 있다면, 120%나 130%까지 그려 넣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다.”
-에스케이에서 선수로 11년 동안 몸담았다. 에스케이의 매력은 무엇인가?
“응집력이 좋다. 슬럼프에 빠지면 선배들이 얘기해주는 선후배간 끈끈한 정이 있다. 팀을 위해 내 능력의 80%밖에 못하면 다른 사람이 120 정도 해줘서 100%를 맞춘다.”
-포수로서 팀 전력의 절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소리 들을 때 진짜 많이 긴장했다. ‘너 정신 똑바로 차려라’는 말로 들었다. 투수들이 나 하나로 인해 많이 움직였다.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나도 의문이다. 내가 포수 자리에 앉아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운영 자체가 달랐다.”
-포수는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린다. 포수의 그런 자질을 어떻게 길렀나?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고 경험이 쌓였다. 야구는 확률 싸움이다. 투수를 이끌어 타자와 싸워서 어떻게 이길까. 주자와 타자, 투수, 바람의 방향 등 수많은 상황을 판단해 사인을 낸다. 그래서 포수의 순발력이 매우 중요하다.”
-포수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고 느낀 시점은 언제인가?
“처음은 쌍방울에서 조범현(현 케이티 감독) 코치를 만났을 때이고, 2006년 은퇴를 생각하다가 김성근 감독을 또 만나면서 모든 게 다 바뀌었다. 그때가 제일 변화가 많았다.”
-모든 게 다 바뀌었다는 말은?
“2006년 말 김성근 감독이 지바 롯데에 코치로 있을 때 보비 밸런타인 감독과 함께 경기를 보러 한국에 왔다. 김 감독한테 죽도록 욕먹었다. ‘네가 한국 최고의 포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최고 밑바닥 포수’라고 하더라.”
-왜 그런 말을 들었나?
“2006년 이전까지 나름대로 톱클래스라고 평가받았는데, 당시 움직임도 둔해졌고 모든 게 많이 떨어졌다. 감독한테 그런 소리 듣고 밀려나면 끝이라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덤볐다. 누가 뭐라 하면 달려드는 스타일이어서 어릴 때는 훈련이 너무 심하면 욕하고 달려들었다. ‘그래 내가 너 잡는다’ 이런 마음 갖고. 시즌 들어갔을 때 자신감이 생기더라. 2006년 말부터 원 없이 운동했다.”
-선수 시절 동료 사이에서 리더십은 어땠나?
“방망이를 못 치면 수비까지 무너지는 선수가 있다. 팀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수비라도 잘하라고 야단쳤다. 다른 선수들이 ‘쟤는 저래도 선배들이 가만 놔둔다’는 마음을 못 갖게 했다.”
-현대 야구에서 포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팀마다 다르겠지만 20%는 된다. 삼성은 진갑용이 앉으면 포수 위주로 많이 움직인다. 어린 포수들이 앉으면 투수 쪽으로 많이 움직인다. 포수가 사인을 낼 때 투수가 고개를 자주 가로저으면 투수 위주로 움직이는 것이고, 포수 사인대로 탁탁 던지면 포수 위주로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가장 많이 고개를 흔든 투수는 누구였나?
“선배들이었다. 많이 싸우고 많이 혼났다. 변화구 던지라고 했는데 싫다며 직구 던진다. 그럼 70~80%는 맞아 나간다. 내가 원하는 사인대로 한번만 던져 달라고 애원도 했다. 진짜 중요한 상황에서는 타임 걸고 올라가서 차라리 던질 거면 볼로 던져달라고 했다. 내가 사인 낸다고 해서 다 안 맞는 게 아니라 맞아 나가는 확률을 낮추는 것이다.”
-계속 말 듣지 않고 던지다 안타나 홈런을 맞으면 어떻게 하나?
“계속 고개 흔들던 투수도 3~4개 맞고 나면 고개 흔들지 않는다. 그래도 포수는 벤치에 들어와서 투수가 포수 사인대로 던졌다고 말한다. 포수는 언제나 투수 편에서 투수를 안아줘야 한다.”
-요즘 제대로 된 기량을 가진 포수가 부족하다는데?
“아마추어는 코치들이 대부분 야수 출신이라서 포수를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프로에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떻게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포수 출신 감독으로 포용력이 남다를 것 같다.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보다는 그게(포용하는 게) 낫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경기 잘못하면 말도 잘 안 하고 속병이 나서 혼자 끙끙 앓는다. 선수 때는 얽히고설키면 더 힘드니까 나 혼자 스트레스 풀면 됐다. 이젠 감독이라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 숙제다.”
-야구에서 감독과 선수, 누가 더 중요한가?
“반반이다. 같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인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욕먹을 각오로 해야 한다. 잘못한 50%는 내 탓이고, 잘한 50%는 선수들 때문이다.”
-감독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인내심이 가장 중요하다. 잘 따라오는 선수들도 있고, 주춤하는 선수들도 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목표치에 다다르지 못하면 스태프나 선수나 답답하다. 배우려는 의욕이 없다면 감당 못하지만 의욕적으로 덤비면 기다려줘야 한다.”
-인생에서 야구란?
“전부다. 은퇴하고 야구판 떠날까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배운 것을 조금이나마 선수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실패한 뒤 노력했다고 하면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 성공한 뒤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인터뷰 이충신 기자c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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