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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7 19:15 수정 : 2014.04.07 20:55

지난 1월 한국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화제의 주인공인 성시연씨가 취임 두달 남짓 만에, 까다롭기로 이름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선보였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경기필 성시연 상임지휘자 겸 단장

지난달 27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객석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무대로 나오는 그의 걸음걸이는 늘 당당하다. 포디엄(지휘대) 위에 서서 지휘하는 모습도 힘 있고 자신에 차 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이자 예술단장인 성시연(39)씨의 취임 연주회가 시작됐다.

지난 1월 한국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로 발탁된 화제의 주인공인 그가 취임 두달 남짓 만에, 까다롭기로 이름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아래 사진)을 선보인 까닭에 클래식 팬들의 관심이 더욱 쏠린 무대였다. 더구나 경기필은 지난해 6월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구자범 예술단장이 사임하면서 수장 없이 표류해왔기에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자 장내는 기립박수로 뜨거웠다. 평론가들은 “경기필의 재발견”, “국내 지휘계의 지각변동”이라고 호평했다. “성시연씨가 거친 경기필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는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여성과 동양인이라는 한계를 깨고 ‘최초’라는 미답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2006년 게오르그 숄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여성 지휘자로서는 처음 우승한 데 이어 2007년 밤베르크에서 열린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최고상(1위 없는 2위), 2011년 독일 음악협회 지휘 포럼 콩쿠르 2등을 잇따라 수상하며 국제 무대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특히 2007년 가을 시즌부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137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2010년까지 명지휘자 제임스 러바인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2008년 서울시향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뒤 2013년까지 부지휘자로 활약했다. 미국의 클래식 라디오 방송 <더블유큐엑스아르>(WQXR)는 지난해 9월 그를 ‘주목할 만한 5인의 여성 지휘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 1일 <한겨레>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취임한 지 불과 두어달 만에 경기필을 장악했다는 평을 받았는데 동의하는가?

“저와 경기필 단원들 모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연주회였다. 현재 계획을 세워나가고 방향을 정하는 중이라서 제 진심이 100% 전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오케스트라가 존재하고, 진심을 담아서 연주해야 한다는 메시지만큼은 단원들에게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라 믿는다. 그날 공연을 본 많은 분들이 기술적으로 거슬리거나 세련되지 못한 부분은 있었지만 열정과 혼을 다하는 진심을 보았다고 칭찬해주었다. 단원들이 한마음으로, 한곳을 바라본 덕분 아니겠는가.”

-첫 연주회인데 굳이 ‘난곡’으로 소문난 말러의 ‘부활’을 선택한 이유는?

“애초 지난해 전임 예술감독과 경기필이 준비했다가 예기치 않은 이유로 취소된 프로그램이었다. 여태까지 경기필의 색깔을 완전히 무시할 생각도 없고, 또 지난해 불미스런 사태를 겪으면서 단원들이나 팬들 모두 ‘상처’를 입었던 만큼 이번에 ‘부활’이라는 주제로 다시 비상할 것이라는 비전과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좋아하는 곡인데 한번도 지휘한 적이 없어서 욕심을 내봤다. 실패할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모 아니면 도’.(웃음) 인생은 (성공과 실패가) 반반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웃음)”

-‘여성 1호’에 예술감독이 아니라 예술단장의 중책까지 맡아 행정적인 책임까지 지게 되었다.

“솔직히 부담 반 기대 반이다. 음악인이니 음악으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겠지만, 제 안의 또다른 잠재된 능력이나 승부욕을 발견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남들이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자기 피아르(홍보)’를 못하는 편인데,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보니 ‘경기필’을 위해서는 나를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각오가 섰다. 부담감, 책임감이 나를 변화시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여태까지 살면서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외국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다면 오로지 음악에 집중하면 되겠지만, 국내이다 보니 ‘우리가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발전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무게가 실린다.”

-경기필을 ‘원석’에 비유한 적이 있던데 특징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단원들이 젊어서 순수한 마음과 높은 집중력, 열린 마음을 갖췄다. 전에 몸담았던 서울시향에 견줘볼 때 처음부터 하나씩 일궈낼 수 있는 원석인 셈이다. 단원들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어서 좋은 면도 있다. 그만큼 가능성도 크고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위험부담도 있다.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모든 것이 다 열려 있는 상태, 그게 지금의 경기필이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부모님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원래는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해서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유치원 시절부터 집을 나와 혼자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부모님이 경찰서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는 배우고 싶다고 졸라서 다섯살 때부터 학원에 다녔다. 생각해보면 꼬마 아이에게 꿈도 못 꿀 일인데, 방황은 타고난 버릇인 듯싶다.(웃음)”

그는 여러 국내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13살에 첫 독주회를 열 만큼 피아니스트로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94년 서울예고를 졸업한 뒤 스위스 취리히음대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96년에는 베를린국립음대로 옮겨 사이먼 라슬로, 에리히 안드레아스 교수를 사사하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다 별안간 2001년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지휘과에 들어가게 된다.

여성으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국공립 오케스트라의 총사령탑이 된 성시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지난 1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밝은 표정으로 취임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을 얘기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피아니스트 길 걷다 25살때 ‘지휘’로
공부 5년만에 국제대회 여성 첫 우승
국공립 첫 여성 상임지휘자 발탁
취임 무대서 말러의 ‘부활’ 호평
“경기필은 원석…가능성 커”

-2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전공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지휘를 배운 적도 없었는데 위험천만한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베를린국립음대 졸업시험을 1년 앞두고 지휘로 바꿨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기는 한데 악기를 만지면서 늘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피아노라는 거대한 악기가 주는 위압감이 컸다. 그때 스승이던 에리히 안드레아스 교수님이 ‘다른 분야의 음악도 다양하게 섭렵해보라’고 조언을 해줬다. 처음에는 평소 흘려듣던 음악을 스코어(모음 악보)나 연주 실황 비디오를 보면서 들어보고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더 자주 가봤다. 그러다가 베를린필의 상임을 지냈던 전설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1886~1954)의 연주 영상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순간 지휘를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나이라서 자꾸 망설여지고 고민만 했다. 그런데 한 선배가 ‘후회하지 말고 3년 정도 공부에 투자를 해봐라. 인생이 70년 정도 된다면 3년은 짧은 순간이다’ 하며 용기를 줬다. 그래서 부모님께 선전포고하고 지휘봉을 들었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해서 2001년 한스 아이슬러 음대 롤프 로이터 교수 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독일 지휘거장 롤프 로이터 사사해
데뷔 연주 전날 병석의 스승 찾아
차이콥스키 ‘비창’ 허공 지휘
“4악장이 너무 아름답구나
살아서 너의 지휘 모습 보고 싶다”

-통독 전 라이프치히 국립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을 지낸 롤프 로이터 교수와 알을 깨고자 서로를 쪼는 ‘줄탁동기’ 같은 사제로 알려져 있다. 로이터의 첫 여자 제자이자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하던데?

“한마디로 로이터 교수는 제게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주신 분이다. 음악을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좌절이 될 때마다 늘 용기가 되는 멘토가 있었다는 게 내게는 행운이었다. ‘성’이 선(태양)과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지 그분은 항상 ‘너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태양같이 세상을 비워라’고 격려해줬다. 제 밑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지휘 이면의 철학을 가르쳐줬다.”

성씨는 아직도 2007년 9월 스승의 ‘마지막 레슨’을 잊지 못한다. 그해 4월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우승을 한 그는 9월 프랑크푸르트 알트오퍼에서 뮤지엄오케스트라와 독일 데뷔 연주회를 하게 됐다. 연주회 전날 베를린으로 달려가 병석의 스승에게 데뷔 소식을 알리자 스승은 즉석에서 레슨을 했다. 스승이 가장 좋아하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그가 허공에 대고 지휘하자 로이터는 “4악장이 너무 아름답구나. 좀더 살아서 너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 스승은 눈을 감았고 제자는 헌정하는 마음으로 데뷔 연주를 마쳤다.

-앞으로 큰 꿈은 무엇인가?

“사실 그동안 좌절도 많이 했다. 로스앤젤레스 필의 음악감독 구스타보 두다멜과 스스로 비교할 때도 많았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도 늘 의식했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좌절과 자가당착에 빠지면서 내 음악이 도태되는 것을 느꼈다. 과도한 욕심에 뭐가 우선인지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결국 원하는 것은 어디에 있든지 인생의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행복해야 좋은 연주가 나오고 음악의 근본을 진실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은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 음악을 하는 게 진정한 음악인이 아닌가. 순간순간 충실할 것, 그것이 지금 내 음악의 목표다.”

인터뷰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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