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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1 19:19 수정 : 2006.03.22 14:09

지난 10년 동안 세차례 허리수술 끝에 겨우 통증에서 해방된 김점순씨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었다고는 믿기지 않게 환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2년 전엔 영남대 의대에 사후 주검 기증을 약속하기도 했다.

■ 병과 친구하기 ■
세 차례 척추수술 받은 김점순씨

“우리 좀 떨어져 살아볼래요?”

척추수술을 세 차례나 한 김점순(67·경북 영천시)씨는 두번째 척추수술을 받은 직후인 지난 1996년 12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하게 아픈 허리통증에 시달린 나머지 남편한테 이혼을 에둘러 제안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뒤 20년 가까이 딸아이 하나 키우면서 홀로 살다가 48살이 되서야 똑소리나고 성실한 사람라는 주위의 호평에 이끌려 재혼하게 된 남편과 특별한 이혼 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재혼한 뒤 이상하게도 넘어져 허리를 다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혼하면 그런 징크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경운기 수리센타를 운영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기름때 묻은 빨래를 하루 두 차례씩 하는 등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허리디스크에 걸려 1992년에 처음 척추수술을 했다. 96년 8월에는 방에서 미끄러져 벌렁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뼈가 끊어지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그때 한 병원에서 수술이 어렵다고 해서 퇴원한 뒤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두달반을 누워 지내다보니 허리 아랫부분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식물인간처럼 꼼짝도 할 수 없어 죽고 싶어도 죽을 길이 없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척추수술이라도 한번 받아보라는 이웃 사람들의 권유로 1996년 11월에 허리뼈를 쇠로 고정하는 고난도 수술을 받은 결과, 등과 배 앞뒤로 ‘보디 자켓’(의료보조기의 일종)을 입고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허리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극심했다. 그는 이를 징크스로 여겨 이혼을 해서라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협의이혼을 하기 위해 등과 배 앞뒤로 ‘보디 자켓’(의료보조기의 일종)을 찬 채 부축을 받으면서 영천시 법원의 2층 계단을 오르는데 눈물이 끊임없이 철철 흐르대요. 계단은 어째 그렇게도 까마득히 높게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요”

남편과 다툼에 의해 이혼한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했겠지만, 허리를 계속 다치는 액운 때문에 두번째 결혼마저 끝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그의 가슴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 것이다.

남편은 당시 법정에서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혼을 해야 한다”고 판사를 설득해 협의이혼을 성사시켰지만,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을 계속 돌봤다.

재혼뒤 자주 다치자 눈물로 이혼 “지금도 친구처럼 날 챙겨줘”
한방 치료로 최근엔 여행까지 “그까짓 몸뚱이 쓰다 버리면 되지”

1997년 7월에 세번째 척추수술을 하게 된 것은 첫번째 수술이 완벽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3개월간 보디 자켓을 착용하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 등 자신의 수술뒤 관리소홀 탓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세번째 척추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병원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지만 극심한 허리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허리 주위 근육이 쓰라리고 따가워 찜질팩 하고 맨날 누워 지냈지요. 진통제를 계속 먹고 바르고, 파스를 붙여도 통증은 계속됐어요.”

방바닥에 넘어져 척추를 다친 때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허리통증의 포로생활을 한 그는 최근에야 요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난 1월부터 요통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대구 진한의원을 다닌 결과 요통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스 한방주치의를 지내기도 한 이동화 원장은 “척추수술을 통해 부러진 허리뼈를 꿰맞추는데 성공했고, 뜸·부항·한약 등으로 허리통증(경근병)을 해소했기 때문에 김점순씨는 앞으로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겪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당일치기이지만 관광버스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달 들어와 10년만에 처음 관광버스를 타고 청도에는 특산물인 미나리를 먹으러, 거제도에는 바다구경을 하러 잇따라 다녀왔다.

관광버스 여행길에는 따로따로 살고는 있지만 이혼한 뒤에도 친구처럼 오가는 재혼했던 전남편이 동행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조심해서 걸어야 하는 등 자신을 꼼꼼히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보통 사람은 짐작도 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 그는 2년 전에 영남대의대에 시신을 기증했다면서 삶에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까짓 몸뚱이, 냄비 처럼 실컷 쓰다가 구멍나면 버리면 되는 것을 시신까지 왜들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지 모르겠어.”

대구/글·사진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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