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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7 18:25 수정 : 2006.06.28 14:17

■ 병과 친구하기 ■ 변비·치질 시달려온 김영자씨 /

“화장실에 가는 게 가장 두려웠어요”

전남 순천시 성남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영자(55)씨는 무려 30여년간 변비 때문에 고통을 받은 전력을 지니고 있다.

변비는 광주교대를 나와 교단에 처음 섰던 1972년 시작됐다. 당시 교대는 2년제였다. 꿈 많은 여고생 티를 벗은지 2년만에 스승의 자리에 선 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일까? 광주교대를 다닐 때까지는 배변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발령지가 전남 화순군 이서 초등학교였는데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너무 놀랐지요. 게다가 여선생은 혼자였어요. 자취를 했는데 아침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지요. 아마도 식생활이 불규칙해 변비가 시작됐던 것 같아요.”

이서 초등학교에서 1년6개월을 보낸 뒤 고향인 순천에서 가까운 승주 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당시에는 순천에서 버스를 타고 50분 가량 가야했으므로 일찍 서두르다 보면 아침 식사를 거르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교사 업무도 과중해 스트레스도 많았다. 한 반에 60명이 넘어 그야말로 콩나물 교실이었던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고, 젊디 젊은 여교사였기 때문에 학예발표 경연대회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합창, 리코더와 같은 분야의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학예발표 전담 교사가 된 것이다.


“쾌변이 안되니 먹는 즐거움도 점점 사라졌어요. 배는 항상 가스가 가득 차 있는 듯 더부룩했고, 그 불쾌감이란 견딜 수 없는 고통, 바로 그것이었어요. 더부룩함을 해소하기 위해 탄산음료를 매일 1~2병씩 마시기도 했어요.”

20대초 교사 부임 때 발병, 휴직·식이요법·마라톤도 ‘무효’
2년전 바이오피드백 치료로 해방

마침내 교사생활 7년째인 1978년에 사표를 냈지만 주위의 만류로 2개월간 휴직한 뒤에 다시 교단에 섰다. 하지만 변비는 사라지지 않았다. 80년대 초부터는 치질까지 생겨 남한테 얘기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기 시작했다.

“90년에 첫번째 치질 수술을 할 무렵에 또 사표를 냈어요. 그 때도 주위에서 변비로 고생하는 제 처지를 배려해주어서 2개월 휴직한 뒤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었지요.”

그러나 습관성 변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변비약을 복용하지 않고 화장실에 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되면서 약 중독자가 됐다. 또 변비에 특효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였다.

“중국 여행을 갔을 때 변비에 좋다는 약을 사기 위해 동행자의 신용카드를 빌리는 등 집에는 항상 변비 특효 식품과 약이 넘처났어요. 지방에 있는 가정집에서는 비데를 가장 먼저 설치했을 거예요. 배변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찜질기 같은 의료기기도 바로 구입했어요. 약국에서 변비에 좋다는 차를 샀는데 우려먹는 것도 부족해 아예 차잎까지 통째로 먹기도 했으니까요.”

변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치질이 다시 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2000년에 두번째 치질 수술을 했다. 당시 의료진은 ‘변비를 해결하지 못하면 치질이 다시 도질 수밖에 없고 그 때는 항문의 괄약근을 보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변비도 문제이지만 치질이 더 큰 문제로 부상한 것이다.

“두번째 치질 수술을 한 뒤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관장약을 사용해 배변을 했어요. 물론 변비약도 매일 먹었지만 변비는 마치 ‘암 덩어리’처럼 사라지지 않았어요”

급기야 그는 마라톤까지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차례 정도는 새벽에 일어나 순천 시내에 있는 팔마운동장에서 마라톤 연습을 한 뒤 출근했다. 부산의 다대포 마라톤대회, 순천의 남승룡 마라톤대회 등의 하프 코스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프 마라톤의 최고 기록은 1시간 54분으로 50대 여성으로서 달성하기 힘든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변비는 계속됐다.

“변비가 심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조금 많이 먹었다고 하면 구토를 하곤 했어요. 소장과 대장이 항상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변비는 숙명적인 질환은 아니었다. 2004년 2월 봄 방학 때 서울 아산병원에서 바이오피드백 치료를 받고 변비에서 해방된 것이다. 바이오피드백 치료는 변비약은 물론 변비에 좋다는 식품을 먹는 것도 아니었다. 10차례에 걸처 골반저근육을 강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30여년간의 고질병이었던 변비가 치유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바이오피드백 훈련을 한 지 세 번만에 변의를 느껴 화장실로 달려가 쾌변을 봤지요.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어요. 냄새는 마치 꽃향기 같았지요. 잘 먹고, 잘 자고, 쾌변을 보는 것 등 인생의 세 가지 기본적인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거죠.”

순천/ 글·사진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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