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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12 17:40 수정 : 2006.09.13 14:14

■ 병과 친구하기 ■
폐암 수술한 방사선사 김명호씨 /

폐암 3기로 왼쪽 폐 아래쪽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링거 주사병을 들고 치료제를 공급중인 줄을 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병실을 걸어나갔다. 경희의료원 내부에서 널리 퍼진 이 엽기적 행동의 주인공은 김명호(49) 방사선종양학과 팀장이다.

수술로 꿰맨 실이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 보다는 폐암 때문에 혹시 일을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너무 커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폐암 수술을 한지 고작 열흘만에 퇴원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 기간 휴직을 통해 몸을 추스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서 계속 일했다.

폐암 수술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중에는 병원의 방사선 치료실에서 방사선사로서 암을 치료하는 일을 하고, 주말엔 한양대 사회복지대 경영학과에서 브랜드 마케팅 강의를, 동남보건대 방사선과에서 의학 용어 강의를 그리고 이따금씩 기업체 초청을 받아 브랜드 마케팅 강의를 진행한 것이다. 항암 치료로 인해 머리털이 듬성듬성 남을 정도로 빠진 모습도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은 지난해 6월 건강보험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직장인 대상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폐암을 발견했다. 권투를 배운 적도 있고, 한 해 전만 해도 마라톤 완주를 3차례나 했을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술 담배 과로로 폐 일부 제거 마취 깨자마자 링거 꽂고 활동
일·강의·봉사까지 예전처럼… 암환자 말벗 돼주는게 큰 기쁨


하지만 그는 고환암을 딛고 세계적인 사이클대회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한 랜스 암스트롱이 “암은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내 삶의 일부분”이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을 소유한 사람답게, 자신이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흔한 암투병 서적도 읽지 않았다. 더 밝고 더 즐겁게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했을 뿐이다.

“뭔가 일을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격이어서 휴직이라도 했으면 오히려 암이 재발했을 겁니다. 폐암 수술을 한지 1년이 좀 지났을 뿐이지만 완쾌됐다는 신념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도 항암제로 화학치료를 받을 때는 너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몰골이 초췌해지고 기운도 없고 식욕이 떨어지고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는 것. 특히 구토증이 심해, 치킨 배달부가 타고 올라간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튀긴 기름 냄새 때문에 탈 수가 없었다. 치킨 냄새가 어느 정도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갈 때까지 한 시간 이상 아파트 공원에서 배회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폐암에 걸린 이유에 대해 담배, 술,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 등 세 가지를 꼽았다. 담배는 하루 2갑 이상 피운 골초였고, 술도 너무 좋아해 두주불사형이었다. 불규칙한 생활은 사람과의 만남을 워낙 좋아한데서 비롯됐다. 호주가가 사람과 어울리는 것까지 좋아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술자리가 일주일에 두 세 차례는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대학 강의와 대한방사선사협회 등 활발한 사회활동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련된 친구들도 술자리를 거들었다. 대학시절 강변가요제에 출전해 인기상을 받은 보컬그룹 ‘장남들’의 멤버 출신인 그에게는 음악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불규칙한 생활은 그의 표현을 빌면 “제 몸을 제 스스로 구타하거나 폭행하는 것과 같았다”고 할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호인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지난 2002년 경희대 경영대학원을 전과목 에이(A) 학점으로 졸업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학구파이기 때문이다. 또 뜻있는 직원들 10여명과 함께 ‘한마음회’란 자선단체를 만들어 불우이웃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이처럼 폭넓은 인간관계는 그가 폐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입원실을 채우고 남을 정도로 많은 화분이 쇄도하는가 하면, 치료비에 쓰라고 돈봉투도 쏟아져 들어와 ‘예상치 못한 거금’을 만지게 된 것이다. 가까운 친척중에는 그에게 산삼을 직접 캐 주겠다고 만날 산에 다니다가 엄청 건강해진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암에 걸린 것은 가족한테 직무유기”라고 규정한 그는 폐암 수술 뒤에는 술자리에 가는 일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전에는 아내한테 보고만 하면 됐으나 이제는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담패 피는 사람 옆에는 앉지 말라’는 조언도 듣는다는 것이다. 또 소중한 가족과 대화시간을 늘리고 독서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앴다.

“폐암 수술 뒤 암 환자에 대한 이해의 폭도 훨씬 넓어졌어요. 밝은 표정으로 나도 암에 걸린 적이 있다고 하면 환자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얘기를 털어놓지요. 요즘은 암환자들의 말벗이 되주는 게 큰 일이 됐어요.”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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