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26 22:06
수정 : 2009.10.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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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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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제동씨가 <한국방송>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워싱턴에서 들었다. 부끄러웠다.
이전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가수 윤도현씨가 강단과 방송에서 밀려났고, 그다음에는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100분 토론’에서 물러났다. 이젠 개그맨 김구라씨도 퇴출 압력을 받고 있다.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물러났다는 증거는 없다. ‘출연료가 너무 많거나’, ‘시청률이 떨어지거나’, ‘말이 거칠거나’ 등이 이유다.
김구라씨가 몇 년 전에 한 인터넷 방송을 뒤늦게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선을 넘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향한 욕설이 인격모독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다고 6년 전 일을 끄집어내 ‘막말 방송인’이라며 퇴출 압력을 노골화시키는 건 조선시대 같은 일 아닌가?
탤런트 박용식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1980년대 초부터 80년대 말까지 방송에 못 나왔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앗간을 하며 참기름도 짰다. 개그맨 심철호, 김명덕씨는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와 ‘턱’이 닮았다는 이유로 수난을 겪었다. 80년대 이야기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탤런트 박철, 개그맨 심현섭씨 등이 방송에서 물러났던 적이 있긴 하지만, 요즘처럼 ‘우연’이 동시에, 연속적으로 일어나진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코미디 소재로 써도 좋다”며 권위주의 타파를 부르짖은 덕분에 개그맨 최병서씨가 신나게 1노3김을 풍자한 90년대 이후, 이런 일은 사라진 줄 알았다. 청와대가 이런 일들을 지시했으리라곤 믿지 않는다. 80년대에는 차라리 솔직했다. 지금 같은 행태는 정권의 지시 여부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현정권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다.
2004년 대선 당시 가수 오지 오스본은 ‘전쟁 돼지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조지 부시 대통령을 아돌프 히틀러에 비교했다. 마이클 무어는 노골적으로 부시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영화 <화씨 9/11>을 만들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대선 기간에 ‘케리’ 티셔츠를 입고, 유권자들을 직접 투표소로 인도하기도 했다. 가수 마돈나, 영화배우 귀네스 팰트로도 존 케리 지지를 공언했다. 미국의 풍토가 우리나라에 비해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데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들이 케리의 선거 패배 뒤 부시 정부에서 ‘갑자기’ “출연료가 너무 많다”며 밀려났다는 소식은 안 들린다. 오프라 윈프리는 오랫동안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왔으나, 그의 쇼는 정권의 향배와 상관없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의 수입은 한 해 2500억원이다. 출연료가 너무 많지 않은가?
골수 공화당 지지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바마 정부 아래에서도 영화 <그랜 토리노>를 찍으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고, 역시 공화당 지지자인 브루스 윌리스도 별 탈이 없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좌파 정권을 교체한 보수정권이 좌파정권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김제동씨나 손석희씨에 대해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몰아낸다면 과거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보수는 공정해야 한다”라고.
이른바 ‘좌파 정권’인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한 공직자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우린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과 맞짱을 떴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가만히 뒤에서 잘라 버린다. 누굴 더 무서워하겠는가?”라고. 그는 한마디 더했다. “정권 보위 측면에선 이명박 정부가 더 똑똑하네.”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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