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09 22:33
수정 : 2009.11.09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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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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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9일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취재차 일본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2년반 전 첫 현지 취재 때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오키나와의 경제는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여전히 일본 꼴찌이고, 실업률은 두배 가까이 높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만은 아닌 듯했다.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생만을 강요하는 미·일 정부의 태도는 큰 변화가 없다.
아베 신조 총리가 아름다운 일본을 외치던 시절인 2007년 4월 오키나와에서 만난 긴조 시게아키(80) 목사의 증언이 던진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3월 문부과학성은 고교 역사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집단 자결’ 사건과 관련해 ‘일본군에 의한’이란 주체 표현을 삭제하라고 지시를 내리며 역사 왜곡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3월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시작된 ‘오키나와전’ 당시 16살이었던 소년 긴조 목사는 “숨어 있던 동굴에서 어머니에게 손을 댔다”며 어머니를 죽였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꺼냈다.
“당시는 살아남는 게 두려웠다. 미군에게 체포되면 팔다리가 잘리고, 여자들은 ‘욕을 본다’는 강한 공포감이 있었다. 그 배경에는 오키나와인들을 총동원하기 위해 일본 군부가 주입시킨 황민화 교육이 있었다.”
집단 자결은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아베 정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결국 2007년 10월 오키나와 현민 11만명이 총궐기 대회를 펼쳐 역사 왜곡의 흐름을 저지했다.
8일 현민 대회에서 분출한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 정서를 추적하다 보면 일왕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기지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지바나 쇼이치(61) 요미탄 마을 의원은 “오키나와 주민 편에서 본다면 천황은 전쟁 책임뿐 아니라 전후 책임도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황은 전쟁 직후 천황제를 없애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1947년 맥아더 점령군사령관 앞으로 ‘오키나와를 25년 내지 50년간 미군이 점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국민도 허용할 것’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를 기초로 1952년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라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분리돼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쇼이치는 1987년 10월26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히노마루(일장기)를 불태운 사건으로 유명하다.
“우리 마을의 집단 자결 사건을 조사하면서 전쟁의 책임은 히노마루, 기미가요, 천황제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또 강제화할 수도 있음을 히노마루를 태움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할 생각이었다.”
8일 저녁 기지 반대 집회 뒤 현지 언론인 <류큐신보> 쪽에서 기자에게 취재 소감을 묻는 인터뷰를 요청해 이렇게 답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오키나와의 민의를 수렴해 후텐마 기지를 ‘현외’로 이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미-일 안보동맹을 우선시하고 현지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본 보수언론의 거대한 벽에 부닥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3년 전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 문제가 불거져 나올 당시 안보를 이유로 군까지 동원해 현지 농민을 몰아낸 사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하토야마 총리는 ‘내가 결정하겠다’며 미국의 거친 공격에도 아직 굴복하지 않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말해놓고도 한편으론 마음이 찜찜했다. 3년 전 국방부를 담당하고 있던 기자는 노무현 정부가 평택 주민과 이전 반대파와 대화하려는 노력이 불충분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런 쪽으로 기사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출입처가 내세우는 안보 현실 논리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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