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23 21:06
수정 : 2009.11.2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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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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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을 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2012>가 중국에서도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유는 다른 나라와는 조금 다르다. 중국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중국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자랑스러운 애국주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가 멸망할 날이 다가오자 전세계 정부들은 주요 인물을 대피시킬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데 그 무대가 중국의 티베트 고원지대다. 대홍수가 닥쳐도 가장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이곳에서 중국인들은 거대한 방주를 완성한다. 중국인들은 영화 속 미국인들이 ‘오직 중국인들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큰 방주를 만들 수 있다’고 감탄할 때,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전세계 주요 인사들을 보호해 노아의 방주로 안내하는 장면에서, ‘인류의 구원자’가 된 중국에 자부심을 느낀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영화 <2012>가 중국에 대한 진심 어린 칭찬이냐, 아부냐, 아니면 은근한 비하냐는 논쟁도 벌어진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이나 별볼일 없는 인물로 묘사되던 중국인의 위상이 ‘중국의 부상’에 따라 괄목상대하게 달라졌다는 자랑스러움이 대세다.
지난주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이런 자신감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전세계 유일 강대국으로 중국에 ‘훈계’하던 미국의 모습은 사라졌고, 미국은 중국과 12년 만에 처음으로 낸 공동성명에 전례 없이 광범위한 전세계 주요 이슈들을 담았다. 이런 낯선 상황을 불편해하는 미국 언론들의 비판 공세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중국 달래기’는 중국에 더 많은 책임을 지우고 협력을 얻어내야 한다는 현실적 계산에 근거한 결론이다.
지난 17일 밤 환영만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바둑 세트’를 선물한 것은 단연 상징적이다.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이 동등하게 바둑판 앞에 앉아 전세계 주요 사안에 대해 함께 신중하게 바둑을 두자는 제안 아닌가.
물론, 중국이 이미 미국과 동등하게 세계의 주요 이슈를 논하고 결정하는 ‘G2’(주요 2개국)가 됐다는 해석에는 분명 과장이 섞여 있다.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20%가 넘지만, 중국의 비중은 아직 6.4%에 불과하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서구에 무릎 꿇기 전인 1820년 전세계 국내총생산에서 중국의 비중은 약 33%였다. 중국이 다시 이런 ‘정상 상황’을 회복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중국이 풀어가야 할 정치·사회적 과제도 만만찮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가 다극적인, 미국만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로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냉전 시기, 소련에 대항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동맹’으로 화해를 시작했던 미국과 중국은 이제 달라진 세력균형 속에서 어떻게 상대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지 아직 분명한 답을 찾지는 못한 모습이다. 앞으로 두 강대국이 함께 둘 바둑 대국에서는 간단치 않은 포석과 전략, 갈등과 곡절이 출현하게 될 것이고 전세계가 그 영향권에 놓일 것이다.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두 초강대국이 새로운 세력균형 속에서 수를 읽기 어려운 복잡한 바둑 대국을 벌이는 동안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조선시대 이래 중요한 시기마다 한 강대국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세계의 정세 변화에 눈감았다가 위기를 자초하는 뼈아픈 오류를 반복했다. 새로운 변화의 파고가 밀려오는 지금 우리는 자주적으로 변화에 대처할 슬기로운 포석을 마련할 수 있을까.
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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