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10 18:37
수정 : 2010.06.10 18:37
|
정남구 도쿄 특파원
|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1994년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내고 자신감을 막 회복하기 시작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무렵 한국은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 호황’의 열매를 본격적으로 거두기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기나긴 어둠의 터널로 막 진입했다. 꽤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인의 자신감은 더욱 확실해졌고, 일본인들도 이제는 한국을 인정한다. 일부에선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거론하며 엄살을 부리기까지 한다.
일본은 왜 그토록 오래 정체했을까? 한때는 ‘구조조정의 지연’과 같은 진단이 가장 믿을만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출산-고령화’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더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쪽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일본의 수출시장이 크게 확대되지 않는 가운데, 내수시장의 축소 혹은 정체가 일본 경제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요즘도 기업들의 가격 인하 경쟁이 매우 치열해 디플레이션이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역동성은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데서 나오는데, 앞날에 대한 전망이 흐리니 활력이 없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출산율은 쉽사리 올라가지 않고 있다.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경기가 나쁘던 2005년 1.26까지 떨어졌다. 2006년부터는 3년 연속 상승해 2008년 1.37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최근 발표를 보면 2009년엔 다시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른바 ‘단카이 주니어 세대’(2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불리는 1971~1974년생)가 지난해부터 출산 적령기에서 이탈하면서 그렇게 된 걸 보면, 2006~2008년 사이 출산율의 반짝 상승도 정부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고 보기가 어렵다.
지난해 8월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한 연구논문이 일본에서는 꽤 관심을 끌었다. 이 논문은 “사회·경제가 발전하면 만혼과 함께 출산연령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떨어지지만, 발전이 어느 정도 진척되고 나면 출산율이 다시 높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개발지수와 출산율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이 연구논문은 “인간개발지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여성의 근로환경, 보육 및 교육시설이 정비돼, 만혼이나 비싼 육아·교육비의 악영향을 뛰어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는 예외로 세 나라가 거론됐다. 바로 일본과 한국, 캐나다였다.
일본에서는 중학교까지는 학비와 의료비가 면제되는데, 그래도 자녀 양육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 유치원생은 도시락을 싸야 하고, 보호자가 직접 데리고 다녀야 한다. 초등학생 학부모도 학부모·교사회 활동 참여 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일본의 새 정부는 고등학교 수업료를 사실상 무료화하고, 중학교 졸업 이전의 어린이에게 어린이수당(현재는 월 1만3000엔)도 주기로 했다. 또 여성이 아이를 편하게 맡길 수 있는 보육원 이용 활성화도 꾀하고 있다. 출산율 제고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수많은 정책이 쌓이고 쌓여야 마침내 효과가 난다. 그걸 알기에 일본은 엄청난 투자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저출산-고령화’가 일본보다 더 심각한 곳은 한국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척되고 있는 한국의 2009년 합계출산율은 1.15에 불과하다. 저출산의 악영향은 상당한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지만,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2 수준으로 떨어진 게 1983년이다. 이대로 가면 지금의 ‘늙고 정체한 일본’은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의 모습이 될 것이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