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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22 20:05 수정 : 2010.07.22 20:05

정남구 도쿄 특파원

갓난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실종돼 지금껏 얼굴 한번 못 본 33살의 아들. 27~28년 전 그 어머니와 북한에서 1년8개월을 함께 살며 일본어를 배웠다는 48살의 여인. 1년4개월 만에 이뤄진 두 사람의 재회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여인은 “그 어머니를 떠올리며, 내가 요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7200㎡짜리 별장을 내줬다. 여인은 그곳에서 불고기와 김치전 등 음식을 손수 만들어 대접했다.

김현희씨와 32년 전 북한에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의 만남은 분명 이야깃거리다. 김씨가 115명이 탄 비행기를 폭파해 한때 사형수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더 극적이게 했다. 일본 정부가 입국불허 대상인 김씨에게 특별상륙허가를 내주고, 전세기를 보내 데려오고, 국빈급 경호를 한 것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일본 공안청이 ‘김씨의 일정은 비밀’이라고 했지만, 이 또한 극적 장치였을 뿐이었다. 일본의 취재진은 20일 새벽 김씨가 도착한 하네다공항에서부터 20여대의 승용차와 6~7대의 헬리콥터로 김씨가 탄 승용차를 뒤쫓았다. 별장 들머리에도 새벽 5시가 되기도 전에 100여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김씨의 얼굴을 철저히 감춰, 신비감을 높였다. 김씨가 머문 3박4일간 일본의 눈은 온통 나가노현에 있는 그 별장으로 쏠렸다. 그것은 드라마라기보다는 떠들썩한 ‘쇼’였다.

일본 정부가 김씨를 초청한 것은 지난해 5월 일본 외무성 관리에게 김씨가 “요코타 메구미를 만난 적이 있다”고 밝힌 게 계기가 됐다. 1977년 11월 니가타시의 해안에서 13살의 나이로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는 북한에서 한국 출신 납북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 북한은 요코타가 1994년 사망했다며 유골을 보냈으나, 그것이 가짜라는 논란이 일면서 요코타는 납치 피해자의 상징이 돼 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소식에 일본은 목말라했다.

하지만 별장에서는 끝내 이렇다 할 새로운 소식이 나오지 않았다. 21일 김씨를 만난 요코타의 부모는 “김씨가 메구미를 딱 한번 만났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사실 새로운 정보가 없다는 것은 애초 뻔했다. 1987년 북한을 떠난 김씨가, 다구치나 요코타의 그 뒤 행적을 알 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나마 김씨가 지난해 미리 건네받은 일본인 실종자들의 사진 가운데서 “봤거나, 본 듯한 사람이 있다”고 일본 경찰에 알려준 게 일본이 거둔 작은 수확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는 평가로, 김씨의 방문을 정리했다.

그래도 나카이 히로시 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담당상이 연출한 ‘김현희 쇼’는 일본에서 꽤 흥행에 성공한 듯하다. 야구도박 파문으로 <엔에이치케이> 방송이 스모 나고야대회를 생중계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문과 텔레비전이 모두 김현희 방일 행적으로 도배를 했다.

일본 언론이 시간이 갈수록 ‘외부의 눈’을 의식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왜 한국에서는 김씨의 방일에 별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다. 한국의 차가운 반응을 전하며, 지나친 취재 경쟁을 자성하는 소리도 나왔다. 영국의 <인디펜던트>가 “체포해야 할 범죄자를 요인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정곡을 찌른 것 같지는 않다. ‘김현희 쇼’는 지금 일본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드러내 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다. 납치 문제가 일본에서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분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이, 왜 제국주의 침략기에 일본이 저지른 참혹한 일로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못 보는 것일까.


정남구 도쿄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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