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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31 19:15 수정 : 2012.06.01 11:18

정남구 도쿄 특파원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어느 날 아끼던 금시계가 안 보이자 경비책임자를 불러 도둑을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면대에서 시계를 찾았다. 스탈린이 ‘이제 됐다’고 하자, 경비책임자가 말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서른 놈을 잡아다 벌써 스물아홉 놈한테 자백을 받았습니다.” 이 지어낸 이야기는 스탈린의 말로 끝난다. “뭐라고? 아직 자백을 안 한 그 한 놈은 뭐야.”

슬프게도 그것은 먼 나라, 남의 얘기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 도쿄에서 한국계 기업의 간부로 있는 한 재일동포를 만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 유학하고 있던 1980년대 초반 어느 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수사기관에 끌려갔다. 수사관이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언제 갔다 왔어?”

바짝 언 그가 “어디를 말하느냐”고 되묻자 수사관은 “이 ××, 좀 맞고 시작해야겠구먼” 하고는 무자비하게 폭행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북한을 언제 갔다 왔느냐는 질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옥고를 치르지 않고 풀려났다. 그러나 많은 재일동포 유학생이 수사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간첩임을 인정하고, 오래 옥살이를 했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이 희생됐다. 일본에 있는 동안 총련계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다면 올가미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들 가운데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이도 여럿이다.

물론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가운데는 실제 북한에 가 간첩교육을 받고 오거나, 간첩 행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그런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조사받을 때나 재판 초기의 자백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 시절 유죄 판결을 들이대며 ‘입 다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은 ‘너 하나 죽여도 아무 문제 없다’며 히죽대던 고문기술자들에게 ‘제발 그냥 죽여달라’고 절규했다는 이들의 영혼을 또 한번 짓밟는 일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법원이 억울하게 죄받은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있다. 고문을 받고 한 자백이 유일한 증거가 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들에게 법원이 재심의 기회를 준 것이다. 지금까지 ‘재일동포 간첩’ 가운데 무죄가 확정된 사람은 6명이다. 4명은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심이 받아들여지거나 재심을 신청한 사람도 10명가량이다.

최근 강종헌씨에 대한 무차별 ‘간첩’ 공세는 그들을 다시 두렵게 한다. 그가 지난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18번을 배정받아, 뜻밖에 국회의원이 될 뻔한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강씨는 서울대 의대에 유학중이던 1975년 구속돼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의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2010년 결론지었다. 법원도 재심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재판 결과를 기다려줄 만큼의 아량은 좀 베풀어도 좋지 않을까?

간첩죄를 쓴 재일동포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꼭 한번만이라도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다가 독재의 위세에 굴복해 법정마저 정의를 외면했던 지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그들은 떨고 있다.

정남구 도쿄 특파원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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