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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14 19:10 수정 : 2012.06.14 19:10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한 남자가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 그 뒤로 부엉이와 박쥐, 괴물들이 그를 덮칠 듯 노려 본다. 남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1799년 제작한 이 음울한 판화에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제목을 붙였다. 이성이 마비되고, 광기와 탐욕이 지배하는 시대를 섬뜩하게 묘사한 <카프리초스> 연작의 하나다.

1966년 8월, 중국에선 홍위병 글씨가 선명한 완장을 찬 어린 학생들이 베이징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16일 공산당 정치국에서 ‘부르주아 대변인들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촉구하는 ‘5·16 통지’가 발표돼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고, 중국인들은 순식간에 격렬한 투쟁의 광기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처음에 문혁은 공산당 관료들의 독재와 특권을 공격하는 ‘반란’으로 시작됐고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호응했다. 문혁의 모델은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자치정부였던 파리 코뮌이었다. 하지만 당 간부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힘없는 지식인과 출신 성분 나쁜 이들이 홍위병들의 ‘먹잇감’이 되게 했다. 반동·우파로 몰린 이들은 강제로 목에 팻말을 걸고, 고깔모자를 쓰고 비판대회에 끌려가 구타와 학대를 당했다. 마오쩌둥은 군중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적수인 류사오치 등을 제거한 뒤 혁명의 불길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군대를 동원해 대중을 진압했다.

문혁 동안 최소 40만명 이상이 고문·구타·자살로 숨지고 수백만명이 박해를 받았으며, 사실상 전 중국인에게 큰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애초에 ‘반란’에 나섰던 대중들이 내건 당 간부들의 특권에 대한 비판, 공정한 사회에 대한 요구는 해결되지 못했고, 당·국가·군대의 권력만 강화시킨 채 끝났다.

중국 현대사에서 권력을 쥔 세력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우파, 주자파(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세력), 반혁명의 낙인을 찍어 박해하고 숙청하는 일은 계속돼 왔다. 1957년, 혁명 뒤 중국에 나타난 특권계급과 불평등을 비판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와 민주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요구한 이들은 ‘우파’로 몰려 숙청됐다. 1989년 6·4 천안문 사건에서도 청년학생과 대중의 반부패, 반특권, 민주의 목소리는 ‘반혁명 반란’으로 처벌됐다.

중국의 6월에 천안문 사건이 있다면, 한국의 6월에는 6·10 민주항쟁이 있다. 천안문 시위는 민주적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났지만, 한국의 6월은 많은 이들의 아픈 희생을 민주주의라는 열매로 바꾸어 냈다. 그 6월에, 쿠데타와 광주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사열,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이 십자가를 밟게 한 것처럼 종북 의원을 가려내야 한다’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발언, 매일 아침 한국 신문들을 뒤덮은 종북론, 사상검증, ‘빨갱이를 가려내라’는 외침이 ‘깨어나라’는 채찍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좀더 공정한 부의 분배, 민생, 취업, 복지에 대한 요구, 불안하지 않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서민들의 목소리에 대한 대답과 해결의 노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낙인찍기’의 광기 뒤로, 불평등이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현실을 은폐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이 숨어 있다. 괴물을 막으려면, 이성이 깨어나야 한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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