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8.09 19:23 수정 : 2012.08.09 19:23

박현 워싱턴 특파원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지 한달이 다 됐다. 집 얻고, 세간살이 마련하고, 휴대전화 개통하고, 먹을거리 장만하고 등등의 정착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아주 낯선 곳에 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식을 추종해온 한국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미국식 삶에 노출돼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것도 적지 않았다. 지난달 20일 콜로라도주 영화관에서 한 대학원생이 중무장한 채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 1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총기 소유 규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평범했던 이 대학원생은 3개월 새 여러 총기와 수천발의 총알을 총기상과 인터넷에서 쉽게 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 경찰은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와 태연하게 “총기와 총알 구입이 모두 적법했다”고 말했다.

총기 소유권을 옹호하는 한 로비단체 대표가 펼치는 논리는 더 놀라웠다. “당시 영화관 관객 중에서 적법하게 총기를 휴대한 사람이 있었다면 사망자 수를 줄이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경찰 출동 전에 시내 한복판에 있는 영화관에서 범인과 관객 간에 자칫 더 많은 사상자를 낼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자체가 나로선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주 만에 또다시 시크교도들에 대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총기 소유 규제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반반으로 나뉘어 있고, 정치 지도자들은 개혁에 소극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면 오는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밋 롬니 공화당 후보 간에 서로를 비방하는 텔레비전 광고가 워낙 많이 나오기 때문에 보기 싫어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볼 수밖에 없다. 한 시민단체가 대표적 경합주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 있는 역 광고판들에 내걸린 정치광고 수를 헤아린 자료를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최근 한주 동안 이 광고판들에는 2000개 이상의 광고가 내걸렸다. 하루 24시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5분당 평균 1개씩 내걸린 셈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선 네거티브 광고가 역대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 보니, 유권자들은 이미 이들 정치광고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다.

이번 대선이 이렇게 혼탁해진 데는 2010년 연방법원이 선거 캠프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인 이른바 ‘슈퍼팩’(정치행동위원회)의 선거자금 지출을 무제한 허용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법원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 보호를 명분으로 이를 허용했는데, 이번 선거에서 보면 사실상 백만장자들의 의사표현의 장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은 민주사회에서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그 자유가 적절히 제어되지 않았을 때 전체 사회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하다. 총기 소유나 정치 광고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독버섯처럼 번진 파생상품 시장을 ‘자유시장’에 맡겨둠으로써 2008년 국제 금융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지금의 미국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지나친 자유방임이 미국을 ‘흔들리는 제국’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