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8.16 19:22 수정 : 2012.08.16 19:22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누구든 물었다.”

1980년 11월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을 일으킨 책임자로 지목돼 법정에 선,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이런 최후진술을 남겼다. 반혁명, 모반, 72만7420명을 박해하고 3만4274명을 죽게 한 죄가 최고지도자였던 마오가 아닌, 그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장칭이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는 모습은 중국 전역에 중계됐다.

“당과 국가에 엄중한 손실을 끼쳤으며,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32년이 흐른 뒤,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의 부인 구카이라이는 영국인을 독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이런 최후진술을 남겼다. 범죄는 흉악하지만 아들이 위협받자 제정신을 잃은 어머니가 저지른 일이고, 당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시나리오다.

막강한 권력자의 아내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두 여성의 드라마는 전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두 재판 모두 사건의 진실보다는 중국 지도부가 외부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다. 1980년대 초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있던 덩샤오핑 등 지도부는 ‘악녀’ 장칭의 몰락을 통해 ‘문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생생한 증거를 중국인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구카이라이는 죄를 인정하고, 당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구카이라이를 통해 후진타오 지도부가 보여주려 한 것은 당의 단결과 안정 제일주의였다. 장칭의 재판이 변화의 신호였다면, 구카이라이 재판은 현상 유지의 신호다.

이번 재판에서 화제가 된 부분은 권력층이 개입된 천문학적인 부동산 거래다. 구카이라이는 법정에서 닐 헤이우드를 살해하게 된 도화선이 대규모 부동산 개발 사업 합작에서 비롯됐다고 진술했다. 구와 헤이우드, 랴오닝성 스더그룹의 쉬밍 회장은 프랑스와 충칭에서 대규모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함께 추진했다. 보시라이가 랴오닝성 당서기로 재임하던 시절, 쉬밍 회장은 보시라이 일가와의 친분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무산됐고, 헤이우드가 개발이 성공하면 얻기로 한 수익의 10%인 1300만파운드(약 230억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생겼다고 구카이라이는 진술했다. 권력과 돈이 결탁해 이뤄지는 중국의 대규모 개발 사업의 한 단면이 의도하지 않게 까발려졌다.

부동산 투자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끌어온 마법이었다.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의 40~50%를 부동산과 기반시설 투자에 쏟아부어 왔다. 이렇게 막대한 돈을 효율적으로 투자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적 감시 장치가 없고, 자원이 국가와 소수 특권계급에 좌우되는 상황에선 쉽게 부정부패와 부실 투자로 연결된다. 중국의 대표적 시장주의 경제학자인 장웨이잉 베이징대 교수는 최근 한 포럼에서 “부패는 항상 존재했지만, 부패의 증가 속도가 지디피 성장 속도보다 낮으면 큰 문제는 안 생긴다. 하지만 이제 부패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전국 곳곳에 들어선 빈 건물만 즐비한 유령도시들, 중소도시에까지 뉴욕 맨해튼의 몇배에 해당하는 고층 건물들이 세워진 초현실적 현실은 부패와 비효율의 불안한 경고음이다.

중국은 변화를 원한다. 구카이라이가 법정에서 “나는 보시라이의 앞잡이였다. 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다”고 외쳤다면, 오히려 중국인들은 그 솔직함과 변화의 신호에 안도하지 않았을까.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