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06 19:20
수정 : 2012.09.0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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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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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중국에서 한 권의 책이 열풍을 일으켰다. 마오쩌둥 시대에 친자본주의적 우파로 몰려 박해를 받다가 숨진 경제학자 구준(顧准, 1915~1974)의 글을 묶은 <구준문집>이다. 오랫동안 금서였던 그의 글들이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햇볕 아래로 나왔다.
구준은 회계사무소 실습생으로 일하며 경제를 공부했고, 1930년대부터 혁명과 항일활동에 뛰어들었다. 공산혁명 뒤 상하이시의 초대 재무국장이 됐고, 1950년대부터 학자로서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벌인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우파로 낙인찍혀 강제노동을 하는 등 22년 동안 극심한 고초를 겪다 폐병으로 숨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식 경제이론에서 탈피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길을 찾으려 했고, 그리스 도시국가를 연구하며 민주주의를 고민했다. 오늘날 그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선구자’로 존경받는다.
중국이 경제 기적을 이루기까지, 시장과 개혁의 싹을 키워 내려 애쓴 구준과 같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이 우파로 몰려 여러 차례 숙청을 겪었고, 개혁개방 과정에서 구준의 동료들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도 여러 차례 굴곡을 거쳤다.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을 선언했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행착오와 반발, 후퇴를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에 시찰단을 보내 그 모델을 열심히 배웠으나 적절치 않았고, 이후에는 헝가리, 일본, ‘아시아의 4마리 용’의 경험을 배우려 애썼다. 집단농장 체제를 포기하고 가정별 생산을 도입하면서 개혁을 시작했지만, 1980년대 내내 보수파의 반격이 계속됐다.
김정은이 인민생활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선언하고 파격적 행보를 보이자, 요즘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북한의 변화가 단연 화제다. 물론 북한을 잘 아는 중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단시일 안에 중국식 개혁개방이나 급속한 변화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북한에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경제 발전을 향한 큰 계획을 준비하고 움직이는 신호는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군부의 경제 개입을 축소하고 내각이 자원을 집중해 경제를 운영하려 하고, 경제특구를 통한 제한된 개방과 농장, 공장의 상대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조처를 내놓고 있다. 북한에도 구준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의 싹을 키워온 이들, 실사구시의 태도로 경제의 변화를 이끌어갈 이들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고, 통제체제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확대하는 위험 부담도 클 것이다. 최대 난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북한이 최근 중국·일본·러시아와 부지런히 접촉하는 것은 그 돌파구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한국에선 ‘북한은 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많다. 역사를 예단하기보다는, 한반도의 긴장을 어떻게 완화할지, 북한 경제의 변화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어떻게 연결할지, 북한의 자원과 한국의 투자를 어떻게 결합시킬지 등을 차분히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지난 5년간 남북관계 악화·단절의 부작용을 체험한 한국인들이 새 지도자를 뽑을 때 따져봐야 할 질문들이기도 하다.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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