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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6 19:17 수정 : 2013.12.26 19:17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아이고…. 마오 주석에 비하면 지금 지도자들은….”

보름 남짓 전 들른 후난성 사오산시의 마오쩌둥 유물 전시관 한쪽에서 가벼운 탄식이 들렸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오쩌둥의 큰아들 마오안잉의 사진과 70여곳을 기워 입었다는 마오의 잠옷이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던 60대 관람객이 내뱉은 말이었다.

신중국 건설의 시조 마오쩌둥 탄생 120돌이 지났다. 26일 그의 탄생일을 맞아 중국 각지에서는 기념 서예전과 문화 예술 행사가 무수히 열렸다. 관영 매체들은 일제히 찬양 일색의 드라마와 평론을 내보냈다.

정치적으로는 평등과 사회주의 기본이념을 중시하는 중국 내 좌파의 움직임이 기념 열기 고조에 한몫을 했다. 시진핑 정권 초기 국정 이념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노선 투쟁이 추모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중국 혁명 지도자인 마오쩌둥을 띄움으로써 자연스레 현재 공산당 집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각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중국 인민들에게 마오쩌둥의 향수를 자극한 것은 고속성장 속에 불거질 대로 불거진 지금 중국 사회의 모순이었던 것 같다. 이미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는 정치재판 논란 속에 49억원의 횡령, 수뢰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법처리설이 끊이지 않는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은 부인과 아들을 포함한 가족의 비리 액수가 천문학적일 것이라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원자바오 전 총리도 청렴 이미지와 달리 일가가 3조원에 이르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고, 시진핑 주석 일가의 보유 재산이 수천억원가량이라는 의혹도 터져나왔다. 고위층 자제들이 국유기업 등의 핵심 이권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외국계 기업의 로비 대상이 됐다는 보도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고위층뿐 아니다. 중국 최고인민검찰원은 올해 1~8월 부패로 인한 낙마 공직자가 4만명에 육박한다고 발표했다. 돌이켜 보면 올 한 해 중국 국내정치를 관통한 것은 ‘부패와의 전쟁’이었다. 농민공의 ‘묻지마 테러’로 대표되는 빈부격차 역시 이젠 사회 안정을 위협할 수준에 육박했다.

이런 모순 속에 다수의 중국 인민들은 마오의 시대를 “그래도 지금보다는 평등한 시대였다”고 추억하는 것 같다. 큰아들 마오안잉은 한국전에 참전해 전사했고, 딸들도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지켰다. 마오쩌둥은 후손에게 특별한 유산을 남기지도 않았다. 한 중국 교수는 “마오안잉이 살아 있었어도 권력 세습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최대 업적이 무엇이냐’는 <환구시보> 여론조사에서 “사회에 평등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응답이 56%나 나온 것은 특권과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마오쩌둥 유물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의 탄식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개인 비서로 초대 중국 사회과학원 원장을 지낸 후차오무의 딸 후무잉은 “점점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빈부격차와 만연한 관료 부패가 마오쩌둥 향수를 더욱 자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전문가인 케네스 리버솔은 저서 <거버닝 차이나>에서 “마오쩌둥이 만약 1956년 죽었다면 후대에 추앙받는 탁월한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76년에 그가 죽었기 때문에 대재난을 초래했다”고 썼다. 통틀어 수천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약진운동(1958~1960년)과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과오를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2013년 세밑 중국 인민은 현재의 고단함을 과거의 비극보다 선명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 속에 마오쩌둥은 이미 탁월한 정치가 차원을 넘어 반신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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