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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3 19:24 수정 : 2014.01.24 14:18

길윤형 도쿄 특파원

‘어, 진짜네!’

며칠 전, 도쿄 제이아르(JR) 야마노테선과 세이부철도가 만나는 다카다노바바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빽빽한 인파를 헤치고 열차에 몸을 싣는 순간 저만치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 허미선씨에게서 얼핏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 <철완 아톰>의 주제가였던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방송>을 통해 방영돼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아톰의 주 무대는 바로 이곳 다카다노바바다. ‘아톰의 아버지’인 일본의 천재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회사 데즈카오사무 프로덕션이 여기 있었고, 그 때문인지 코주부 박사(오차노미즈 박사)가 장관직을 맡고 있는 과학성의 위치도 이곳으로 설정돼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런 의미를 담아 2003년 3월부터 제이아르 다카다노바바역에선 열차의 출발 경고음으로 아톰의 주제가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엔 별생각 없이 지나치고 말았지만, 아톰에는 데즈카 오사무만의 독특한 철학이 반영돼 있다. 이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게 바로 아톰의 주제가다. “하늘을 넘어서, 별의 건너편”으로 시작해 “10만 마력이다, 철완 아톰”으로 마무리되는 주제가의 핵심 어구는 절정구에 등장하는 “마음이 착한, 과학의 아이”라는 부분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잡지 <소년>에 아톰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52년 4월이었다. 같은 달 일본에서 2차 세계대전 강화협상의 결과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돼 패전 뒤 7년간 이어진 미국의 점령기가 종식된다. 그에 앞서 터진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일본 사회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긴 장기성장의 초입에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전후의 혼돈을 극복한 일본 사회가 내일을 향한 장밋빛 전망을 그리며 거대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본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를 모은 것이 바로 아톰(Atom), 즉 원자력이었다. 아톰의 키는 겨우 135㎝, 몸무게는 30㎏에 불과하지만, 가슴에 장착된 작은 원자력 모터를 통해 무려 10만 마력의 힘을 낼 수 있다. 그런 아톰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을 배신하지 않고, 늘 밝게 웃으며, 지구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 과학 기술의 힘. 아톰에 투영된 ‘마음 착한 과학의 아이’란 이미지는 바로 그런 철학을 담은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로 아톰에겐 여동생이 있는데 이 아이의 이름은 우란(우라늄)이다.

그러나 데즈카가 처음부터 낙관론에 경도돼 있던 것은 아니다. 그가 1949년 발표한 <메트로폴리스>에는 아톰의 원형으로 보이는 ‘티마’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엄청난 힘과 초능력을 지닌 티마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티마에게 악당 ‘레드’가 나타나 티마의 탄생 비밀을 밝힌다. 큰 혼란에 빠진 티마는 엄청난 초능력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악마가 되어 버린다. “모두들 봤지, 우리를 갖고 논 인간들의 말로는 바로 이거다. 이제 우리가 인간들을 괴롭힐 차례야.” 그리고 2011년 3월 후쿠시마를 통해 우린 아톰의 이면에는 흉포한 티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티마에서 출발해 유쾌한 꼬마 아톰으로 전환하는 데즈카의 여정은 패전의 시련을 딛고 부흥을 이뤄낸 일본 사회의 저력을 상징한다. 선택은 이제부터다. 일본인들은 상냥하고 충직한 아톰과 결별하는 또 다른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결단은 ‘아톰의 미몽’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탈핵’을 쟁점으로 치러지는 2월9일 도쿄 도지사 선거가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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