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13 19:04
수정 : 2014.02.1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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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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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했던 중국의 춘절이 지났다. 지상엔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탄이, 하늘엔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꽃이 베이징의 밤을 지새웠다. 거리엔 트로이 목마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조형물과 장식이 말띠해임을 알렸다. 방송마다 ‘마다오청궁’(馬到成功·금방 성공하세요)이란 말이 넘쳐났다.
하지만 모두가 춘절의 화려함을 향유한 것은 아니다. 중국 사회의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외치던 지식인들은 잔치에서 소외됐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와 교육 기회 확대를 요구하던 쉬즈융,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차별 정책 시정을 주장해온 일함 토흐티, 민주·환경·인권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온 후자가 바로 그들이다.
모두 40대 가장인 이들은 영어의 몸으로 춘절을 맞았다. 쉬즈융은 지난달 1심 재판에서 사회 공공질서 방해죄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민족대학 교수인 토흐티는 당국에 연행된 상황에서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발표됐고, 후자는 이들의 목소리를 지지하다가 당국에 끌려갔다.
이들은 모두 일상의 안일함을 박차고 나왔다. 쉬즈융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젊은 법학 교수의 길을 걸었다. 2002년 베이징 우전대 강사가 된 그는 이듬해 서른살의 나이로 베이징 하이뎬구의 인민대표로 6년 동안 일했다. 하지만 2010년 3월 신공민운동에 몸담은 뒤 그의 삶은 바뀌었다.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 연행이 이어졌다. 2011년 나선 인민대표 경선에서는 당국의 방해 탓에 낙선했다.
후자는 부모가 각각 칭화대와 난카이대학을 나온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베이징경제학원을 졸업했다. 사막 조림 활동에 투신한 그는 1996년엔 베이징 텔레비전의 환경 보호 프로그램의 연출가로 활동한다. 하지만 이후 후자는 에이즈 퇴치 운동과 인권 활동으로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혀갔고, 당국의 탄압에 직면했다. 2004년 천안문 사태 15돌 기념 활동 조직 혐의로 첫 구류를 산 것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감옥을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의 이력은 체포, 가택연금, 입출감 기록으로 빼곡하다. 불과 1년여 전에도 그는 공안의 제지를 몸으로 뚫고 가택연금 중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의 아내를 위로하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7살배기 딸이 있는 그는 지난해 초 아내의 호소로 홍콩 이주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일이 벌어지면 나의 전장인 베이징에 즉시 돌아오겠다”던 다짐처럼 인권운동과 민주화의 현장에 빠짐없이 나타났다.
일함 토흐티 역시 위구르족으로선 드물게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의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신장 위구르인들의 경제적 차별에 관한 연구는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입을 닫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는 당국의 거듭된 위협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국의 탄압이 닥쳤을 때도 이들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쉬즈융은 “민주는 동서양의 구분이나 자본, 사회주의의 구분이 없는 인류의 가치다. 사회 진보와 정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토흐티도 연행 전 “온갖 감시와 압박을 당하고 있는 일상이나 감옥이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후자는 당국에 끌려가면서도 태연히 “24시간 안에 연락이 닿지 않으면 변호인에게 연락해 달라”는 문자메시지를 지인들에게 남겼다.
한국 사회에선 이젠 좀처럼 보기 힘든 사회의 ‘변호인’들이 중국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들의 바람이 ‘마다오청궁’ 할 리는 없겠지만 메아리는커녕 자신들의 목소리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공처럼 산을 옮기고 있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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