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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0 19:06 수정 : 2014.02.20 19:06

길윤형 도쿄 특파원

2007년 봄에서 여름까지 주간지 <한겨레21>에서 야스쿠니신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공동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해 5월 도쿄에서 활동하던 황자혜 <한겨레21> 전문위원이 한국인 희생자의 야스쿠니 합사 취하소송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노(No)합사’의 야마모토 나오요시와의 인터뷰 기사를 보내왔던 기억이 난다. “계속되는 패소에도 왜 꾸준히 일본의 전후보상 책임을 묻는 소송에 참여하느냐”는 질문에 야마모토는 “이 문제는 일본인 스스로 결말을 지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땐 잘 몰랐지만 한-일 관계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는 답변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한-일 사이엔 야스쿠니 문제,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가 남아 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한-일 과거사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는 이들은 “한국의 불평불만과 트집에는 끝이 없다”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제 해결의 전망은 보이지 않고, 서로간의 증오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가 복잡할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문장의 주어, 곧 문제 해결의 ‘주체’가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가 착종돼 있는 독도 문제의 해결 주체는 아마도 한·일 양국 정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 문제에 대해선 주체가 일본의 시민사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는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가 (미안하지만) 베트남 사회가 아닌 한국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베트남 사회가 한국인들을 상대로 이 문제를 엄중히 추궁한다 해도 한국 사회가 잘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인식하는 것은 지금까지 진행돼 온 한-일 과거사 운동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을 요구하는 일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에서 일본 사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인들의 투쟁은 지난 2011년 8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된 게 아니다”라는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로 큰 틀에서 일단락이 된 것일지 모른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해 온 일본 시민들은 지난 7일 도쿄에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를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최근 험악한 일본 사회의 상황을 반영한 탓인지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반일일까’로 정해져 있었다. 위안부 운동은 반일이 아닌 여성을 위한 인권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해 차갑게 식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녹이겠다는 주최 쪽의 고뇌가 담긴 주제라고 생각했다.

최근 <산케이신문>은 위안부의 동원과정에서 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 때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문의 사장을 지낸 시카나이 노부타카는 <지금 밝히는 전후 비사>(1983년)라는 구술집에서 육군 경리학교에서 “(위안소에 들어가) 멍석을 깐 다음에 나올 때까지 장교는 몇분, 하사관은 몇분, 병사는 몇분이라는 것까지 배워야 했다”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 한국 사회에 남겨진 과제가 있다면 국가가 개입된 이런 엄중한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해 구원을 받는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 자신임을 선량한 친구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설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운동은 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친일’ 운동일 수 있으며, ‘친일’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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