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3 19:07
수정 : 2014.04.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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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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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 걸까….’
지난달 27일치 <요미우리신문>의 1면 기사를 읽고, 어안이 벙벙해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문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추진되던 한-일 간 국장급 회담의 의제를 둘러싸고 양국 간 이견이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이번 회담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처’를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인 데 견줘, 일본에선 “독도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내용으로 의제를 넓히자”며 맞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갈등 상황은 몇 시간 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정례 기자회견에서 관련 내용을 에둘러 시인하며 사실로 확인된다.
위안부 얘기를 하자는데, 독도라니….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절충점을 찾아내야 하는 대일 외교의 어려움이 다시 한번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일본이 독도 카드를 빼들었다는 것은 한·일 정상이 만났으니(그래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국내 여론을 달랬으니) 그것으로 됐을 뿐, 위안부와 관련된 논의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한민국의 지난 69년 외교사에서 독도와 관련해 두 차례 거대한 외교적 실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번째는 ‘러스크 서한’이다. 서한은 2차 대전의 평화조약인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였던 딘 러스크가 양유찬 당시 주미대사에게 보낸 서한을 뜻한다. 서한은 안타깝게도 “독도는 1905년 이후 일본의 관할권 아래 있었으며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번도 없다”며 독도와 관련해 일본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이 서한은 왜 나온 것일까. 1951년 제1차 한-일 회담의 수석대표로 임명된 유진오는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대학의 교수를 지내고 서울에 돌아와 있던 친일파 최남선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유진오가 그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있냐”고 묻자, 최는 껄껄 웃으며 “그뿐이 아니다. 한국의 목포, 일본의 나가사키, 중국 상하이 사이에 삼각형을 그으면 그 가운데 파랑도(이어도로 추정됨)라는 곳이 있다. 그곳도 우리 영토라고 확실히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견을 받아들여 1951년 7월19일 양유찬 당시 주미대사와 한표욱 일등서기관은 일본은 “대마도, 파랑도, 독도를 영토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서한을 미국에 보냈다. 한국 정부가 독도에 대한 주장을 하며, 오랜 시간 일본의 영토였던 대마도(쓰시마섬)와 정확히 북위·동경 몇도 몇분 몇초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수중 암초를 함께 끼워 넣은 셈이다. 미국은 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에 대한 회신이 바로 1951년 8월5일자 러스크 서한이다.
그리고 두번째 실책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2012년 8월11일의 독도 방문이다. 이 방문으로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한국의 독도 영유를 암묵적으로 묵인해 온 일본 정부의 독도 정책이 뒤집힌다. 이후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서 독도 문제를 따지자는 위협을 거듭하고 있고, 교과서엔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기술을 의무화했다. 앞으로 일본의 독도 도발은 이어질 것이다.
오랫동안 한-일 관계의 막후에서 활동해 온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언젠가 “독도는 우리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된다. 단 하나만은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독도를 갖고 일본을 약 올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약이 올랐고, 자국에 불리한 양국 간 현안에 대한 협의를 거부하기 위해 독도 카드를 빼들기 시작했다. 이 전 대통령의 무책임한 외교가 한국 외교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크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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