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24 19:09
수정 : 2014.04.2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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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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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랬겠지만, 지난 일주일은 ‘암흑’이었다. 도쿄의 거리를 걸으며 자주 초점을 잃었고, 지인과의 취재 약속을 잊었으며,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 멍하니 일상을 보내는 동안에 세월호 안에 갇혀 서서히 숨져갔을 아이들의 원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집단적인 죄의식은 아마도 우리 세대 안에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메신저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 후배는 “일본인들은 그 수많은 재해로 인한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물었다. 1995년 한신 대지진으로 숨진 이들은 6000여명이고,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지진해일)에 쓸려가 숨진 이들은 1만5000여명에 이른다. 그뿐인가. 뒤이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26만7000명이 고향을 잃고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선 월~목요일 오전 10시50분 <그날, 나는>(あの日、わたしは)이라는 5분 정도의 짧은 다큐멘터리를 내보낸다. 지난 동일본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직접 나와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방송이다. 내용은 특별하지 않다. 어떤 날은 사고로 모든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각지에 흩어진 택시 기사들이 회사의 무전기를 이용해 곳곳의 정보를 지자체 쪽에 전달했다는 사연을 소개하고, 다른 날은 쓰나미를 피해 작은 배를 타고 표류하고 있던 어린 학생이 물속에 빠진 다른 남성을 구한 사연이 등장한다. 이제는 살아남아 사회에 복귀한 남성은 카메라 앞에서 “그때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한다”며 한숨을 내쉬고, 학생은 3년 전 그를 덮쳤던 바다를 바라보며 “(그를 구하고 두명이 돼) 안심했습니다. 혼자서는 불안했으니까”라고 말한다. ‘처참한 재해를 막진 못했지만, 서로가 조금씩 지혜를 짜내고 도와 사회의 결정적인 붕괴를 막아냈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말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불러낸 한 일본인 기자도 이런저런 얘길 들려줬다. 그는 15년 정도 되는 기자 생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간사이 지방 효고현에서 벌어졌던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를 꼽았다. 2005년 4월25일 23살이었다는 젊은 기관사가 몰던 열차가 커브를 틀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탈선해 철로 주변의 건물과 충돌했다. 그 사건으로 기관사 본인과 승객을 포함해 107명이 숨지고, 562명이 다쳤다. 당시 사진을 보니 열차가 얼마나 강한 속도로 부딪혔는지 기관사가 탄 첫번째 차량은 건물 안으로 처박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사고가 출근 시간대에 나는 바람에 피해가 훨씬 더 커졌다고 한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그렇듯 당시에도 모든 책임을 열차 기관사에게 돌리려는 흐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모든 책임을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면, 사회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사 책임을 묻는 ‘수사’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 재발을 막는 ‘조사’라는 것이다.
세월호 선장인 이준석은 우리 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였을까. 굳이 따지자면 모든 일을 적당히 남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는 대한민국의 매우 평균적인 인간상에 가까울 것이다. 이준석은 그를 ‘살인자’라 부르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우리 모두 안에 도사리고 있다.
정성스런 위로에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앞으로 이 사고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지는 오로지 한국 사회의 몫이다. 이제는 서서히 울음을 그치고, 눈을 똑바로 뜨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이들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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