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5 18:37
수정 : 2014.06.0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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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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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사키 우케루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본격화되던 초입인 2011년이었다. 당시 국제 뉴스의 ‘핫이슈’로 떠오르던 동아시아 영토 갈등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 그가 쓴 <일본의 국경문제>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일본 외무성의 국제정보국장을 역임했다는 이력이 눈에 띄어 아마존을 통해 책을 구입해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얌전한 제목과 달리 책은 매우 ‘반미’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일본이 현재 겪고 있는 북방영토(쿠릴열도 남단의 4개 섬), 센카쿠열도, 독도 등 영토 분쟁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합국과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며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이들 영토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고,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본의 노력을 간섭과 위협으로 방해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해 왔다는 주장이었다.
도쿄에 부임해 반년쯤 지난 4월에 그를 인터뷰하게 됐다. 그는 평소 성향대로 집단적 자위권을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서 일본 자위대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만들기”라는 말로 설명했다. 대략의 질문을 마친 뒤 그에게 ‘반미’(그는 스스로를 ‘반미’가 아닌 ‘자주’라 불렀다)가 된 이유를 물었다. 그가 입에 올린 것은 1972년 ‘닉슨 쇼크’와 1985년 ‘플라자 합의’였다.
닉슨 쇼크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일본에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중국과 외교관계 회복에 나선 뒤 일본 정부가 받은 거대한 충격을 일컫는 말이다. 마고사키는 이를 통해 “결국 미국이라는 나라는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플라자 합의. 그간 누적된 천문학적인 대일 무역적자를 견딜 수 없게 된 미국은 이 조처를 통해 강제로 엔화를 절상한다. 이때 발생한 엄청난 엔고(엔화 강세)로 산업 경쟁력을 잃게 된 일본의 자금은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부동산 시장으로 몰렸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본 국내의 ‘산업 공동화’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이다. 마고사키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1970~1980년대 일본 외무성에는 일본이 자주적인 외교를 해야 한다는 흐름이 주류를 형성하게 됐다”는 설명도 곁들여줬다.
이런 얘길 듣고 일본 외교를 살펴보니, ‘친미 일색’인 한국 외교와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납치자 문제와 관련된 북-일 합의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진행 중인 대러시아 정책 등이 대표적인 예다. 도고 가즈히코 교토산업대학 교수(전 외교관)는 월간 <세계>(세카이) 6월호에 “현재 중-러의 접근은 일본에 사활적인 중요한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북방영토뿐 아니라 중국 견제를 위해서라도 러시아와 협력을 유지해야 하고, 이에 실패해 중·러가 한데 묶일 경우 일본이 입게 될 상처는 상상조차 어렵다는 고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대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려는 미국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보기엔 얄미운 일이지만, 일본 외교가 빛을 발하는 것은 미-일의 국익이 절묘하게 엇갈리는 이런 선택의 순간들이다. 앞으로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조만간 개막하는 월드컵을 시청하는 마음으로 팝콘을 꺼내놓고 구경하려다 마음 한편이 어두워진다. 일본 외교가 활약하고 있는 사이 대한민국의 대북·대러시아 외교는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이대로 정신을 놓고 일본의 개인기 외교를 구경만 해도 되는 것일까.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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