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7.17 18:17 수정 : 2014.07.17 18:17

길윤형 도쿄 특파원

‘저것은 또 무슨 뜻일까….’

지난해 9월 일본에 부임해 1년 가까이 아베 정권에 대한 기사를 쓰며 문득문득 엄습해 오는 낭패감에 좌절해야 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그가 추진하는 정책을 통해 현실화되는 ‘결과’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린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태연히 “배고프기 위해 밥을 먹는다”고 말한다면, 기자는 이를 어떻게 보도해야 할까. 그가 말하는 언어 그대로 기사를 써야 할까, 아니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도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런 얘기다. 지난 1일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인 ‘각의 결정’(국무회의 의결) 이후 아베 총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조처로 인해) 앞으로 일본이 전쟁에 말려들 위험은 한층 더 사라질 것이다. 일본이 다시 전쟁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면 일본은 자국이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해외의 무력 분쟁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일본은 분명히 ‘다시 전쟁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쟁에 말려들 위험’은 전보다 더 커지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20일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검증은 하면서도 “담화를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담화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면 검증을 그만두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묵살한 채 검증을 진행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14일엔 “중국과 올 11월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중국이 주목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선 “언급을 피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중국과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면, “다시 신사를 찾지 않겠다”고 명확한 입장을 밝혀줘야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린 일본이 담화를 정말 계승하는 것인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한테 적잖은 당혹감과 낭패감을 느끼게 하며, 가뜩이나 불신으로 가득 찬 동아시아의 신뢰 조성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일찍이 일본의 이런 현실을 ‘애매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오에에 따르면 애매함(ambiguity)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을 파고들면, ‘하나의 말에 두 개의 대립적인 의미가 있다’는 뜻과 연결된다. 그는 이런 인식 아래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애매한 일본의 나’에서 전후 민주주의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 아래 재출발한 일본이 평화헌법의 초심을 잃고 조금씩 이상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현실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오에의 연설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의 애매함은 더욱 노골화됐다. 아베 정권은 이제 애매함을 극대화시켜,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하려 하고,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 말하면서 ‘검증’하며, 중국에 정상회담을 요구하면서 신사 참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애매한 일본’은 앞으로 동아시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예측은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외부로 표현된 ‘언어’ 그대로를 믿을 수 없게 된 상대와 만나 대화해야 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는 현재 한국 외교가 직면한 가장 주목받지 못한 거대한 도전일지 모른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