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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7 18:15 수정 : 2014.08.07 18:15

길윤형 도쿄 특파원

“한국에선 1965년 한일협정 개정이 (현재 한-일 관계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당연한 귀결이겠군요.”

“그런 셈이죠.”

두어달 전 도쿄 신바시의 한 허름한 이자카야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 기자 두 명과 얼굴을 마주했다. 대화의 주제는 일상의 신변잡기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최근 경색 국면이 장기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반으로 확장돼 갔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위안부 문제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등 다양한 원인을 가로지른 1시간여의 대화는 결국 내년으로 체결 50돌을 맞는 한일협정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국인에게 1965년 한일협정은 무엇일까. 이 협정은 협상이 진행되던 1960년대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민족적 자긍심에 적잖은 상처를 남긴 부도덕하고 불의한 협정으로 남아 있다. 14년6개월이라는 긴 협상 끝에 가까스로 합의에 이른 협정은 한·일 양국 사이의 여러 근본문제를 미봉하고 있다. 한일협정에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사실에 대한 사죄가 없을 뿐 아니라,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대해서도 “(병합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면서 불명확한 언급에 그치고 있다. 또한 협정은 독도가 한·일 어느 쪽에 귀속되는지 여부를 덮어뒀으며,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유·무상을 합쳐 5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을 일괄 수령했다는 이유로 ‘개인 청구권’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협정은 냉전 질서 아래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한·일 양국 간 관계 개선을 강력히 희망했던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좀더 대등한 관계 설정을 원한 한국 내부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방식으로 단행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한국 시민사회한테 협정은 줄곧 타도의 대상이었다. 현상적으로 보기에 핵심적인 갈등 원인은 한일협정으로 양국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데서 비롯된, 이른바 ‘개인 청구권’ 문제였다. 이런 협정의 결론에 납득할 수 없었던 한국 시민사회는 “협정 당시 어떤 논의가 진행됐는지 알아야겠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정부는 2005년 1월 4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문서를 공개한 데 이어, 같은 해 8월엔 “위안부 문제 등은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기존 견해에 대한 수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에선 2011년 8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된 게 아니다”라는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이 이어졌다. 한국 안에선 이미 한일협정의 존재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에 견줘, 일본인들은 여전히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이 제공한 경제협력자금이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고 믿고 있으며, 국내 정치적인 상황을 이유로 국가 간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으려는 한국 사회의 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현재 진행 중인 한-일 갈등은 한두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털어버릴 수 있는 현상적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일협정을 ‘굴욕’으로 바라보며 개정을 희망하는 한국 사회와 이를 ‘일본의 선의’였다고 느끼는 일본인 사이에는 쉽사리 극복할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한일협정 이후 반세기 동안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양국 관계의 근본적인 재조정을 요구하는 한국과 기존 질서의 유지를 희망하는 일본 사이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등한 한국’이라는 낯선 개념과 일본은 어떻게 마주할까, 또 우린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 나갈까.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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