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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1 18:45 수정 : 2014.08.21 18:45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베이징에서 기차로 2시간을 달리면 서해와 인접한 휴양도시 베이다이허에 닿는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중국 지도부들의 여름 휴양 회의인 베이다이허 회의가 열린다.

하지만 마오쩌둥 시절만 해도 중국 정계를 뒤흔든 여름 회의 장소는 베이다이허가 아닌 루산(여산)이 더 유명했다. 양쯔강이 감아도는 해발 1800여m의 루산은 높은 고도만큼 서늘한 기후와 운치 있는 안개로 유명하다. 장제스 전 국민당 총통의 여름 별장이 있던 곳이기도 한 이곳은 그와 상극이던 마오쩌둥도 좋아했다. 시와 서예에 조예가 있었던 마오는 시심을 뽐냈다고 한다.

55년 전인 1959년 8월 루산에서 열린 여름 회의는 펑더화이 당시 국방부장이 낙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강직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회의에서 ‘영원한 혁명가’ 마오쩌둥의 극좌 유토피아 운동이었던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기근을 비판하다가 숙청당한다. 마오는 펑더화이를 겨냥해 “내가 틀리고 군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농촌에서 새로운 홍군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겠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이 회의가 중국 대장정 동료 사이의 우애가 끝나고 마오의 1인 지배 체제로 향하는 시발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국방부장 후임은 마오 우상화에 완장을 찬 린뱌오가 물려받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70년 8월. 다시 루산에서 열린 여름 회의에서는 린뱌오가 몰락한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 어록을 펴낸 바 있는 린뱌오는 당시 자타가 공인한 마오의 황태자였다. 린뱌오는 자신의 후계자 지위를 굳건히 하고자 향후 자신의 몫이 유력한 국가주석직을 유지하자고 했지만, 조기 레임덕을 우려한 마오는 단호히 거부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린뱌오의 최측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숙청함으로써 황태자의 책봉을 사실상 철회했다. 위기감을 느낀 린뱌오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채 5개월여 뒤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그 뒤 중국은 덩샤오핑에 이를 때까지 마오의 후계자 선정을 두고 10년 가까이 표류한다.

올해 중국 지도부의 베이다이허 여름회의는 그 성격이 비공개, 비공식적인 것임을 고려하더라도 유난히 조용하게 지나간 듯하다. 지난해엔 장쩌민 전 주석이 참석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올해는 이마저도 없었다. “장 전 주석 등 원로들이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의 낙마와 처벌에 합의했다”는 것도 지난해 여름 회의 이야기다. 중국 정계 안팎에서는 “반부패, 반사치 드라이브를 제1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도부만 휴양촌에 따로 모여 회의하는 걸 꺼린다”는 말이 돈다.

이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는 해석은 “시 주석은 상왕 노릇을 하는 원로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창구가 되는 비공식적인 여름 회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무력진압을 원로 회의에서 결정한 데서 보듯 중국 정치에서 원로의 입김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그러나 현재 원로들의 처지는 이달 초 저우융캉 사건 조사 발표 뒤 그리 한가하지 않은 편이다. 최고위층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면책특권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세간에는 원자바오 전 총리, 쩡칭훙 전 부주석 등이 부패 척결 선상에 올라있다는 말이 돈다. 일부에선 장쩌민 전 주석까지도 회자된다. 2014년의 베이다이허 회의가 훗날 역사가들에게 “중국의 해묵은 원로·비선 정치를 마무리하는 전환점이 된 회의였다”라고 평가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인사나 결정이 있을 때마다 나도는 ‘7인회다, 정아무개다’라는 우리네 청와대의 비선 정치설은 언제쯤 그칠까?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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