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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1 18:24 수정 : 2014.09.11 18:24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1945년 중국이 처음으로 일제의 항복을 받아낸 후난성 즈장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2~3년에 한번 있을까 한 낙뢰와 폭우가 왕복 내내 비행기 날개를 붙들었다. 속수무책으로 허비한 시간만 7시간여. 악명 높은 중국의 항공기 연착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1일 어렵사리 도착한 즈장 항일전쟁승리기념관에서 한국인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중화민족의 불굴의 저항’이나 ‘영광스런 승리’가 아니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버젓이 걸린 대만 국민당의 청천백일기와 장제스의 대형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장제스는 제복 차림에 칼을 찬 당당한 모습이다. 한때 중국 공산당이 ‘토비’라고 깎아내렸던 그다. 중국 공산당 당국자들은 “국민당이 전면에서 싸우고, 공산당은 후방에서 적을 교란했다. 항일은 함께 한 전쟁이다”라고 설명했다. 박물관 기념품 가게엔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익살스레 어깨동무를 한 도자기 인형을 팔고 있다.

국·공의 지도자였던 둘은 원수에 가까운 위치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박멸의 대상으로 여겼다. 당시 압도적 강자였던 국민당은 마오쩌둥의 부인 양카이후이도 처형했다. 1936년 시안 사변 뒤 마지못해 2차 항일 국공합작을 하기 전까지 장제스는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공산 ‘비적’(匪賊) 토벌에 매진했다. 공산당이 영광의 신화로 기리는 대장정도 실상은 국민당에 쫓긴 공산당의 비참한 대후퇴에 가깝다.

즈장 항일기념관의 풍경들은 낯설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발 없는 상상력은 곧장 분단 한반도로 내달았다.

과연 한국에서 이런 풍경이 가능할까? 한국 어느 항일기념관에 냉정한 사실에 입각한 김일성의 항일 행적을 다룰 수 있을까? 분단 이후 진행된 북한의 과장과 남한의 격하에서 자유로운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말이다. 북한 역사를 연구해 온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저서인 <북한 현대사>에서 “김일성이 1932년 만주 안투에서 조선인 항일 무장대를 조직해 보천보 공격을 주도하고 일본 마에다 중대를 전멸시켰다. 다만 보천보 공격 당시 5명의 일본 순사는 모두 도망갔고, 120명의 마에다 부대 전사자는 대부분 조선인이었다”고 적시한다. 한국 어느 박물관 상점에서 김구 혹은 이승만과 김일성이 우스꽝스럽게 함께 어깨동무를 하거나 악수를 하는 인형을 볼 수 있을까. 어느 기념관 해설가가 “남과 북의 지도자가 모두 일제에 항거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어 며칠 뒤 중국 관영 언론들은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항일 열사 300명 가운데 국민당 출신 인사들이 3분의 1가량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즈장의 장제스 초상과 청천백일기, 국민당 출신의 항일 열사 선정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자신감이다. 미국과 어깨를 겨룰 만큼 양대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자신감이 양안 관계에서도 배어 나온 것이다. 이제 굳이 국민당과 대만을 헐뜯지 않고 과거를 사실대로 인정해도 기반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유로움이다. 중국의 여유 속에 양안 관계는 어느 때보다 밀월기다.

우리도 조금은 여유로울 수 없을까. 중국과 대만같이 현격한 덩치 차이만큼은 아니라 해도 한국도 경제력에서 북한을 40배 이상 앞지른다. 한 중국 학자는 “북한이 한국과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세계가 다 안다. 그런데 한국이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해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 자신감이 없는가?”라고 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담대하게 한두 수 정도는 접어주며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건 보수 위정자들이 말하는 ‘순진한 방심’일까? 글쎄….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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