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나라를 처음 방문해 본 것은 9년 전인 2005년 10월이다. 당시 일본 사회가 중심이 돼 추진하고 있었던 ‘소록도 갱생원, 대만 낙생원(러성위안) 보상청구 소송’의 취재를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는 한센인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무지한 상황이었고, 그래서인지 그해 10월25일 선고된 이 소송의 1심 판결 내용은 한국 언론에서 별로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소송의 쟁점은 일본 국회가 2001년 6월 제정한 ‘한센병 보상법’이 정한 보상 대상에 일제 시기에 만들어진 한센인 요양소인 소록도 갱생원과 대만의 러성위안이 포함되는가 여부였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일본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절멸 정책’이 인권 침해임을 인정하고 1인당 800만엔에서 14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률을 제정한 상태였다. 이 법을 근거로 일본 변호사들이 소록도와 러성위안의 한센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1심의 결론은 진심으로 예상밖이었다. 같은 사안에 대한 일본 법원의 판단이 정반대로 갈렸기 때문이다. 소록도 재판을 맡은 민사3부에선 “소록도는 보상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원고 패소 판결했지만, 러성위안을 담당한 39부에선 “러성위안도 적용 대상”이라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항소를 망설이던 일본 정부는 결국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여론에 떠밀려 소록도와 러성위안 피해자들에게도 1인당 800만엔의 보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했다. 한센인들을 응원하던 일본 시민사회의 따뜻한 열정에 감동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나의 일본어 첫걸음>이란 일본어 문법책을 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둘러싼 한-일 간의 공방을 취재하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나 당시 판결문을 수소문해 읽어 보았다. 원고의 손을 들어준 39부의 ‘판결 요지’는 달랑 3장, 그 반대의 판단을 한 3부의 판결 요지는 무려 14장이었다. 39부에선 “법률이 현재 일본 국외에 있는 요양소까지 보상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제외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견줘 바람직하지 않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한 데 견줘, 3부에선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기 위해 길고 긴 복잡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보상을 하기 싫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베 정권은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5~6일 ‘요시다 증언’(일본 정부가 직접 조선인 여성을 사냥하듯 강제동원했음을 인정한 증언)이 오보임을 인정했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의 관헌이 위안부 여성을 강제동원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이를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 정부의 모든 법적 책임은 사라졌다는 논리가 추가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었으며, 이를 관리·운영하며 여성들에게 씻기 힘든 고통을 줬다는 것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또 1965년 협정의 구조 속에서도 소록도 사례에서 보듯 명백한 인권 문제에 대해선 개인에게 직접 보상을 한 예도 있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상식이기도 하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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