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23 18:40
수정 : 2014.10.2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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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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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점거 시위를 취재하려고 간 홍콩은 가마솥 같았다. 행정장관 자유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의 열기가 그러했고, 숙소를 나서자마자 안경알을 뿌옇게 만들어버리는 습기가 그러했다. 우산은 필수품이었다. 수시로 내리는 아열대성 소나기와 아스팔트를 달구는 태양을 가리려면 말이다. 갑작스러운 최루 스프레이를 막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우산은 아스팔트의 오아시스이자 방패였다.
시위는 무료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화롭고 질서정연했다. 바깥에서 온 관찰자에게는 ‘무슨 시위가 이렇게 평온한가’라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적어도 중장년층으로 이뤄진 반시위 집단과 ‘흑사회’(黑社會)라 불리는 폭력배들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장에선 병뚜껑까지 분리수거했고, 시위대 사이를 잇는 난간엔 화살표로 오가는 길이 나뉘어 설치됐다.
취재 기간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중국과 홍콩의 현격한 인식차’였다. 그만큼 접점도 난망해 보였다. 중국으로선 2017년 치러지는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2~3명의 후보자 가운데 고를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준 것은 일종의 특혜라고 여긴다. 비록 친중국 성향이 강한 1200명의 후보 선거인단 표결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해도 말이다. 중국 24개 성, 5개 자치구, 4개 직할시, 2개 특구 가운데 홍콩 말곤 어디에도 주민들이 정부의 수장을 직접 뽑는 곳은 없다. 3년 전 중국판 직접민주주의의 장으로 이목을 모았던 우칸촌도 광둥성의 말단 행정구역에 불과하다.
홍콩의 학생과 시민들의 눈높이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논리를 받아들이기엔 그들이 받아온 민주주의 교육의 수준이 한참 높다. “부모가 결혼 상대로 괴팍한 사람, 지저분한 사람 등 2~3명을 정해놓고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한 홍콩 중학생의 말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뒤 27년의 민주 경험을 누려온 한국인들에겐 홍콩 시위대의 논리가 중국의 논리보다 훨씬 더 귀에 잘 들어온다. 그래도 특혜를 줬다는 중국과 가짜 선거라는 홍콩, 마치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중앙정부와 특구의 인식은 다르다.
게다가 ‘중국을 기아와 군벌의 폭력, 일제의 침략에서 구했다’고 중국 공산당이 내세우는 정통성도 홍콩인들의 마음엔 큰 울림을 일으키지 못한다. 영국의 기만적인 아편전쟁 뒤 1842년 영국에 편입된 홍콩은 중국과는 다른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나 1949년 신중국 건국, 수천만명이 아사했다는 대약진운동과 10년 동란인 문화혁명까지 중국의 신산한 근현대사는 베이징에서 2000㎞ 남쪽으로 떨어진 홍콩과 겹치지 않는 역사였다. 홍콩은 1997년에야 중국으로 돌아왔다. 65주년 국경절(중국의 건국 기념일)이던 1일 홍콩 센트럴 지역에서 만난 한 중년 시민의 “그래서 왜요?”라는 말은 따로 살아온 역사를 고스란히 비춰 담아낸다. 올해 4월 중국인 관광객 부부가 홍콩 도심 거리에서 아이의 소변을 누인 사건을 두고 대륙과 특구가 서로 “홍콩인들이 중국인들을 깔본다”, “중국인들은 공중도덕을 무시한다”며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도 170여년 이산의 역사가 드리운 그림자다.
홍콩과 중국의 이산 경험과 인식차는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한반도는 남북이 60년 넘게 판이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환경 아래서 살고 있다. 격차는 중국과 홍콩에 비할 바가 아니다. 홍콩 우산혁명 지도자들은 민주화라는 한국의 과거를 거울삼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게 홍콩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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