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18 18:34
수정 : 2014.12.1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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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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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다. 소련 붕괴 10년을 맞아 러시아 자본주의 실험의 현주소를 보고 싶어서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람은 겐나디 야나예프(2010년 73살로 사망)다. 그는 1991년 8월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보수 강경파의 불발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를 만난 곳은 모스크바 외곽의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나는 “10년 전 소련은 지금의 중국처럼 시장경제 체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조처를 취할 수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같은 모델을 받아들일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예가 없었다. 지금 러시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주의의 평등정신을 살리면서 시장경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본다.” 야나예프의 핏발 선 강렬한 눈빛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장경제 체제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와만 어울린다는 게 상식처럼 돼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면서도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이 영웅이 된 이유다. 그의 경제정책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흑묘백묘론’이 잘 상징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3년 전 집권할 때 일각에선 그가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미국에서도 초기엔 그런 관측이 일부 있었지만, 핵실험 등을 겪으면서 그런 기대는 사실상 사라진 것 같다.
미국 당국자들이 북한을 얘기하면서 가장 많이 거론하는 것이 경제발전과 핵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병진노선’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2일 베이징에서 미-중 정상회담 뒤에 “우리는 북한이 경제발전과 핵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10일 “병진노선은 정책이 아니라 몽상”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북한에 핵개발을 허용할 경우 그것이 국제 핵 비확산 체제에 미칠 타격을 우려한 때문이다. 북한에 핵을 허용하면 여러 나라들이 북한의 길을 따를 수 있는 탓이다.
북한이 처한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핵개발을 하면서도 경제를 발전시키고 싶으나 미국이 이를 용인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미국의 경제 제재 속에서도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은 가능하다. 최근 3년간 북한이 소폭의 성장을 이룬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처럼 농어업과 광업, 경공업 중심으로는 그럭저럭 생존은 가능할지 모르나 도약은 어렵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 단계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경제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공장 건설을 위한 외자 유치와 상품 판매를 위한 수출 시장 확보가 필수적이다.
북한도 중국처럼 시장경제를 접목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병진노선이 미국과의 핵 협상과 6자회담 재개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진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지도이념으로 공표하는 한 협상에 나설 명분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만큼 북한이 어떤 형식으로든 비핵화가 최종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트랙2 회의에서 비핵화 의지를 밝히고 있으나, 미국은 이를 믿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선 북한 최고지도자가 안보가 보장되는 대가로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마침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에 손을 내밀 만큼 냉전 청산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내년엔 한반도에서도 이런 희소식이 들리길 기대한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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