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29 18:46
수정 : 2015.01.2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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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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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아직까진 미국과 쿠바의 국교가 단절돼 있어 직항편이 없다. 제3국을 경유해야 했다. 워싱턴에서 멕시코시티까지 5시간, 비행편이 없어 하루를 묵은 뒤 다시 아바나까지 약 3시간30분을 가야 했다. 직항이 있다면 마이애미에서 30분, 워싱턴에선 3시간20분이면 갈 길을 이렇게 멀리 돌아서 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쿠바에선 미국에서 만든 신용카드는 사용이 불가능해 현금 보따리를 들고 가야 했다. 쿠바는 미국의 금수조처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달러를 쿠바 돈으로 바꿀 때는 10% 벌금까지 부과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국달러를 캐나다달러로 환전한 뒤 쿠바에 들어가서 쿠바 돈으로 바꿔야 했다. 환전 수수료가 두배 더 든 셈이다. 모두가 두 나라의 반세기간 적대의 산물이다.
이런 탓에 투덜거리며 아바나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바나와 그 속의 삶을 보면서 이런 불평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밤 9시께 도착한 아바나 공항은 여느 다른 나라 공항과는 달랐다. 공항의 불빛이 전기 사정 탓인지 희미했다. 수도 국제공항이지만 탑승구는 16개에 불과했다. 그 시간엔 택시도 잘 오지 않아 가까스로 차편을 구해 숙소에 도착했다. 도로마저 울퉁불퉁해 차가 자주 뒤뚱거렸다.
일반 시민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신산한 삶에 더 우울해졌다. 소련 붕괴 때까지는 정부에서 주는 배급과 월급만으로 생활이 가능했으나 그 이후 삶은 180도 변했다고 한다. 한달에 배급으로는 열흘, 월급까지 포함해도 15~20일 정도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한 시민은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그래서 대부분 뭘로 돈을 벌까 항상 궁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쿠바인들이 이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 데는 사회주의 시스템의 저생산성도 큰 원인이지만, 이웃에 있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무자비한 금수조처의 영향도 컸다. 미국은 1962년 무역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중남미 국가들의 손목도 비틀어 이 제재에 동참하도록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엔 미국 항구를 이용하는 배는 쿠바에 가지 못하게 했고, 국제금융시스템의 이용마저 제한했다.
아바나에 가기 전엔 왜 쿠바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쿠바에서도 위기를 맞았던 1990년대 초·중반에 개혁개방 논쟁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개혁개방을 할 경우 기존 체제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외부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없었던 중국·베트남과 달리, 쿠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마이애미에 있는 망명 세력들로부터 직접적 위협에 시달려 왔다는 걸 근거로 들었다고 한다. 물론 기득권 세력의 정권 유지를 위한 자기변명일 수 있지만,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 암살 및 정권 교체 시도가 있었으니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을 하지 않느냐고 쉽게 비판한다. 분명 현 체제 유지로 이익을 보는 북한 기득권 세력의 잘못된 선택 탓도 크지만, 이웃 남한과 동맹세력 미국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의 앙숙 미국과 쿠바가 국교 정상화의 길에 나섰듯이, 한반도에서도 그런 일은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언젠가 미국의 한 상원의원에게 한 말처럼 각자의 숙제를 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는 전시의 교량과 같다. 이것은 전시에 파괴될 때처럼 쉽게 재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시일이 걸린다. 양측이 자기 쪽 교량 부분을 재건한다면, 우리는 승자와 패자 없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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