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2 18:23
수정 : 2015.03.1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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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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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이따금 막걸리를 마시며 “꼭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는 책들을 추천하곤 했다. 회사 내에서도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그 선배가 자주 입에 올린 책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유작인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였다.
처음엔 겁도 없이 미국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영문 원서로 된 책을 주문했다. 다행히 중고 책의 값은 1달러(우송료가 20달러였다)였고, 2주 정도의 기다림 끝에 성경책만큼 두껍고 우람한 책이 배달돼 왔다. 매일 저녁 퇴근해 돌아온 뒤 열의를 갖고 ‘원서 독파’를 위해 애썼지만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번엔 아마존 재팬에 들어가 두권으로 나누어진 일본어 번역판을 찾아냈다. 이후 일주일쯤 걸렸던 해외 출장길의 길동무 삼아 책을 독파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보니 벌써 한국어 번역판이 나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저작인 탓에 어설픈 찬사는 생략한다. 핼버스탬이 보기에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받아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 직후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허리가 잘리고, 압록강을 눈앞에 둔 맥아더의 진격은 다시 한번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에 예봉이 꺾인다. 이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중공군의 남침을 원주~지평리에서 견뎌낸 것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3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기술한 장대한 저서 속에 등장하는 한국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제외한 대한민국인)은 이승만과 백선엽 딱 두 사람뿐이다. 책 속에서 이승만은 다소 신경질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고집불통, 백선엽은 한국인 장교 가운데 유일하게 전투를 할 줄 알았던 군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주변 인물일 뿐 한국전쟁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한 한국인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책은 김일성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스탈린은 왜 이를 승인했는지, 마오쩌둥은 왜 지원을 약속했는지, 해리 트루먼은 왜 참전을 결정했는지, 맥아더는 왜 38선을 다시 넘었는지 등을 이들의 개인적인 특성과 놓여 있던 국내외적인 정세 속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일본에 부임해 근무를 하는 특파원으로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현안은 ‘집단적 자위권’으로 상징되는 일본 안보정책의 변화다. 아베 정권은 지난해 7월에 지난 69년 동안 이어진 헌법 해석을 과감히 바꿔 자국이 공격을 받지 않아도 일본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이어 지금은 자위대법, 주변사태법 등 전후 70년 동안 유지된 일본의 안보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법 개정을 진행하는 중이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큰 고통을 받았던 한국인 입장에서 매우 경계되는 일이긴 하지만,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일본이 주체적으로 안보 태세를 정비해 가는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한국이다. 동아시아에 다시 한번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자국 총리의 판단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시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한국은 버락 오바마(미국 대통령)와 커티스 스캐퍼로티(주한미군사령관)에게 우리의 생살여탈권을 넘겨야 한다. 우리는 제 운명의 주인이긴 한 것일까. 오바마가 아닌 박근혜, 스캐퍼로티가 아닌 최윤희(합참의장)의 결단으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이제 그만 후손들에게 뭔가 전할 말을 찾아야 한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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