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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9 18:22 수정 : 2015.07.09 18:22

‘부루마블’ 게임이 있다. 대략 197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라면 누구나 알 만한 보드게임이다. 세계 유명 도시에 건물을 지어 누가 더 많은 돈을 벌었느냐로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다. 방학 때면 게임에서 쓰는 지폐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주사위를 굴린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도시별로 호텔, 빌딩, 별장을 지으면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는지 외울 정도다. 1930년대 미국의 ‘모노폴리’(독점) 게임을 본뜬 이 게임판엔 서울을 비롯해 24개 세계 주요 도시들이 대륙별로 나와 있다. 1980년대 초반 게임이 출시된 때문인지 중국이나 러시아(당시 소련) 등 공산국가들이나 인도, 아프리카 신흥국들은 게임판에서 찾아볼 수 없다.

비록 단순한 주사위 게임이지만 볼 때마다 지극히 자본주의에 충실한 게임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게임은 빨리 땅을 사들여 많은 건물을 짓는 사람이 이변이 없는 한 승리한다. 처음 시작 때 무인도라는 함정에 빠져 출발이 늦으면 몇 바퀴를 돌아도 결국 격차를 만회할 수 없다. 게임이 미국의 대공황 때 만들어진 탓에 ‘강자만이 살길이다’란 생각이 담긴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발 주자’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세속적인 교훈을 던진다.

중국이 베이징에서 자본주의 국제 금융질서에 도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협정문 서명식을 성공리에 마쳤다. 낙후한 아시아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목표로 내세운 은행이다. 순조롭게 향후 절차가 마무리된다면 연말께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중국은 “끊임없이 국제 금융질서에 참여해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고 그럴 능력도 갖췄지만 기득권에 막혀 번번이 한정된 작은 역할에 그쳤다.”(충칭대 야오수제 교수) 이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의 중국 지분이 각각 4%와 5.5%에 그치는 것만 봐도 명백하다.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1000억달러 자본금 가운데 297억여달러를 출자해 단숨에 주요 안건에 대한 거부권도 쥐었다. 부루마블의 ‘슬로 스타터’가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승리하기 힘든 한계가 분명하듯, 개혁개방 이후 국제 금융질서의 뒤늦은 참여자로서 변방에 위치한 중국으로서는 기존 국제금융 질서에선 답이 없었다. 결국 스스로 새판 짜기에 나선 셈이다. 서명식 전까지만 해도 “거부권을 지니거나 행사할 뜻이 없다”, “기존 국제금융기구와 협력하겠다”라고 한껏 자세를 낮췄던 중국은 사인이 끝나자 한껏 위세를 과시한다. 한 관영 언론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엔 기회이자 위기다. 한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여를 통해 건설, 통신, 교통 분야의 기업들이 외국에 진출하고, 젊은 국제 전문가를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지분율도 3.81%로 역대 우리가 참여한 국제금융기구 지분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나 이 지분율만으로는 이사국이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을 추진하는 중국의 내심은 동남아와 자국의 서부 내륙 개발에 기울어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이 주변국, 국제기구와 함께 북한 경제개발을 지원할 목적으로 만들겠다고 밝힌 동북아개발은행 구상에도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다시 부루마블 게임판을 들여다본다. 대만 타이베이는 있지만 베이징은 보이지 않는다. 세계 금융의 중심 뉴욕과 런던은 나란히 붙어 있다. 일본도 아시아가 아닌 서구 선진국이 자리한 곳에 도쿄가 있다. 과연 몇년 뒤 새로운 부루마블 개정판이 나온다면 베이징의 위치는 어디쯤 될까.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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