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9.03 18:34 수정 : 2015.09.03 18:34

“모든 사람이 겁을 먹었다.”

1981년 3월4일,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버몬트주의 가장 큰 도시 벌링턴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무소속으로 시장에 당선됐을 때 <유피아이>(UPI) 통신은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고 한다.

버몬트주의 유일한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지금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바짝 뒤쫓고 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샌더스에 대한 미국 주류 사회의 공포를 이해할 만하다. 1981년은 미국 신자유주의의 원조 격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했던 해이고,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던 때였다. “트로츠키주의자가 벌링턴에 입성했다”거나 “샌더리스타스(Sanderistas)들이 벌링턴을 접수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샌더리스타스’는 1979년 니카라과에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샌더스의 이름을 합해 만들어낸 말이다.

샌더스는 4명의 후보가 겨루는 시장 선거에서 10표 차로 가까스로 당선됐다. 아무도 그를 시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시의회는 그가 몇몇 참모들을 시청 직원으로 채용하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견고한 관료사회는 그의 구상들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했다. 벌링턴의 기업인들도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랬던 샌더스가 1981년부터 2년 임기의 시장을 네번이나 연속으로 재직한 뒤 하원의원 8번을 거쳐 상원의원까지 연임하고 있다. 벌링턴 시장 때의 ‘업적’이 그를 전국적 정치인으로 밀어올린 게 틀림없었다. 그가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지난 5월 처음 출정식을 치른 곳도 벌링턴이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시장이었을까?

샌더스는 벌링턴의 갑부였던 토니 포멀로가 섐플레인호 호숫가의 불모지에 호화 호텔을 지으려는 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구나 보트를 빌려 탈 수 있고, 핫도그도 사먹을 수 있으며,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시민을 위한 호수’로 바꾸었다. 시장으로 당선되자마자 시장 직속의 예술위원회를 만들어 시민들이 무료로 예술과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서민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사업도 벌였다. 시예산 20만달러를 종잣돈으로 공공기금을 조성해 토지를 매입하고, 서민들은 여기에 집을 지어 자신이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주택 매매도 시장 원리에 충실한 미국 사회에서 혁명적 정책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슈퍼마켓이 없던 벌링턴 시내에 대형 식료품 체인점이 마켓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런 제안을 거부하고 소비자들이 주인인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시장에 당선될 때마다 그의 지지율은 한 계단씩 올라갔다. ‘갑부’ 토니 포멀로조차도 샌더스의 추진력과 열정을 보고 든든한 우군이 됐다.

벌링턴은 샌더스가 시장이 되기 전부터 ‘좌파 도시’ 아니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광과 싼 물가, 버몬트대학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층이 많고, 1960년대 뉴욕 등에서 반전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이 일부 이주해 오기는 했다. 하지만 유권자 분포로 보면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편안하게 공존하는 곳’이었다고 미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냉정하게 보면 현재로선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해도, 30여년에 이르는 정치 인생을 사회주의자로 외길을 걸어온 그에게 유세 때마다 지지자들이 몰려드는 현상은 흥미롭다. 2008년 금융위기로 드러난 미국 사회의 병폐가 그만큼 깊고, 진정한 변화를 통해 희망을 찾고 싶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일 게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