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17 18:46
수정 : 2015.09.17 18:46
아버지가 숨진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느닷없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8개월간 앓다가 깔끔하게 가셨다. 삼일장을 치르고 벽제화장장으로 옮겨진 아버지의 주검은 이내 한줌 가루로 변했다. 스무살 애송이였던 난 어안이 벙벙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골 처리를 두고 가족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쟤(나와 누이)들이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데….” 찾는 이 없이 유골이 방치될 것을 우려한 어머니의 강력한 주장 앞에 이견을 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주 헤엄쳤다는 여주 왕대리의 남한강가와 옛집 뒷동산에 유골을 나누어 뿌렸다. 지난여름 이명박의 ‘녹차라떼’가 넘실댔을 강천보 언저리다. 시간이 흘러 철이 들고 보니, 그래도 유골을 어디다 제대로 모실 걸 그랬다는 회한이 든다.
지난 14일 오후 일본 이바라키현의 오아라이 항구로 나가 홋카이도 곳곳의 사찰 등에 보관돼 있던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 115위의 유골을 맞았다. 이번 봉환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은 한·일 정부가 아닌 양국 시민들이 모여 만든 ‘강제노동 희생자 추도·유골봉환 위원회’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 만에 이뤄지는 귀향길이지만, 이날 저녁 도쿄 추모식이 열린 주오구 쓰키지 본원사(혼간지)에서 한국 정부 관계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후레자식은 나뿐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던 것 같다. 유골은 18일 부산에 상륙해 20일 파주에 안장된다.
한국 정부는 조상들의 유골엔 별다른 관심이 없을까? 그렇진 않다. 2010년 이런저런 취재를 하다 국가기록원에서 ‘재일본 한국인 유골봉환(1966~1967)’이라는 외교문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서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남겨진 유골을 둘러싼 남북간의 갈등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골칫거리로 남겨진 조선인 군인·군속들의 유골을 후생성 별관 2층 창고에 보관하다가 1971년 5월 도쿄의 저명한 사찰 우천사(유텐지)에 안치한다.
남북간 체제경쟁이 최정점에 달해 있던 시대였다. 1959년 시작된 북한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타격을 입은 한국 정부는 ‘산 자는 빼앗겼으니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우천사 유골 2300여위를 돌려달라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교섭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남한 출신자들의 유골은 돌려줄 수 있지만 연고자가 확인되지 않는 북한 지역 출신자들의 유골을 돌려주긴 힘들다”며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유가족 또는 연고자가 없는 유골(북한 출신자 유골)은 동경 내의 적절한 장소에 매장”하자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총련계 단체들이 지역의 사찰 등에서 유골 인수 활동을 벌이자 “조총련계에서 유골 인수를 위해 책동하고 있다”고 견제에 나서기도 한다. 북한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유골을 도쿄에 매장하자는 주장을 보고선, 과연 이자들이 생각이 있는 자들인가 하는 분노가 일었다. 그러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상대로 유골 반환 요구를 한 뒤 우천사에 있던 남한 출신 유골 대부분은 한국에 봉환된 바 있다. 그 사업이 끝난 게 5년 전인 20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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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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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 대통령의 의뢰를 받은 일본 정부가 이후 전국 사찰 등을 대상으로 조선인 유골 조사를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10일치 <홋카이도신문> 기사를 보니 일본 각지에서 확인된 조선인 유골이 1014구나 된다고 한다. 조만간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인데, 저 많은 유골을 그대로 둘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르면, 어느새인지 모르게 정말 후레자식이 되고 만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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