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24 18:56
수정 : 2015.09.24 18:56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년1개월여 전 한국을 방문해 광화문에서 미사를 집전했을 때도 지척에 있던 외교부 기자실에서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존경하지만, 엄청난 인파 속에 묻혔을 때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종교 담당 기자도 아니어서 편한 마음으로 근처 식당 주인과 ‘오늘 손님 많았냐’며 가벼운 화젯거리로 삼았을 뿐이다.
지난주 일주일 동안 취재차 쿠바에 다녀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쿠바 방문 기간과 일부 겹쳐, 환영행사와 아바나 혁명광장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차량통제로 아바나의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30~40분씩 걸어 행사장까지 가야 한 탓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쿠바의 도로가 좁아 교황을 코앞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행운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쿠바 방문을 취재하면서 교황의 한국 방문이 떠올랐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 정상화를 격려하는 교황의 쿠바 도착 인사말을 들으며 부러움과 아쉬움이 커졌다. 1년여 전 한국에 도착해 “한반도 평화를 마음속에 담아왔다”는 교황의 귀한 말씀을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속에 담지 못했다. 교황의 한국 방문 이후 대결적 남북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고, 변동성은 되레 커져 있다. 교황이 북한까지 방문했다면, 아니 개성공단이라도 방문했다면, 최소한 판문점이라도 방문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상상마저 떠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이념적 대립과 가난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에서 사역하던 그가 중남미 가난의 구조적·이념적 측면에 눈을 뜬 것은 1998년 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쿠바 방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했지만, 반미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이유로 유례없이 강도 높은 제재를 쿠바에 가한 미국 정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봤다.
사실, 적대국가에 대한 제재는 이론적으로는 사치품 등의 수입을 막아 정권의 핵심 엘리트들을 옥죄기 위한 수단이지만, 현실은 제재를 당하는 국가 주민들의 극심한 생활고로 이어진다. 내전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던 수단을 5년 전 방문했을 때 하루 150달러짜리 호텔에서 모닝빵과 계란프라이, 생토마토, 우유 1잔 등만 있던 ‘1식3찬’의 아침 뷔페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금 쿠바는 수단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아 보였지만, 90년대 초에는 ‘평화시의 특별기간’을 선포하며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였다.
교황은 이념적 대립이 할퀴고 간 가난한 중남미의 현실과 그 정점에 있던 쿠바 문제를 자신이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겼던 듯하다. 그가 ‘정치적 행보’라는 일부 보수세력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미국과 쿠바의 관계 정상화에 정성을 기울인 이유이다. 그가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설파한 것은 ‘우회적으로 쿠바 정부를 비판한 것’이라는 서구 언론의 얄팍한 해석을 뛰어넘는, 훨씬 더 깊고 깊은 오랜 고민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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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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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삼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교황 방문기간이었던 지난해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하천과 산림 공동관리, 환경공동체 형성, 민생인프라 협력, 북한 지하자원 개발 등 숱한 제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작이라도 한 게 있는가. 다분히 교황의 방문을 의식한 말잔치였음이 지난 1년간의 남북관계 성적표는 보여주고 있다. 교황님께 죄송하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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