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애하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인 나카노 고이치 조치대 교수(정치학)의 강연회에 참석했다. 나카노 교수는 현재 ‘입헌 데모크라시의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일본의 소장 정치학자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아베 정권의 폭주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로운 비판을 날리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우익들의 ‘반격(백 러시)의 원년’이 되는 1997년이 일본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였다. 1990년대 초·중반의 일본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회였다. 당시 자민당의 주류를 점하고 있었던 이들은 국제협조주의를 강조하는 온건한 정치인들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 사회는 위안부 모집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지난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내놓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용기를 내 밝힌 이러한 역사인식은 이후 일본과 아시아 사이의 화해의 물꼬를 텄고, 2000년대 꽃을 피운 한류 등 한-일 우호 흐름의 기초가 됐다. 동시에 일본 사회 한켠에선 반동의 움직임도 싹을 틔우고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 이듬해인 1996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1997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 대한 검정 결과를 발표한다. 그 결과 당시 사용되던 모든 교과서(7종)에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포함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 한국의 검정 교과서에 분노를 느끼듯, 이는 일본 우익들에게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당장 1997년 1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됐고, 다음달인 2월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은 이가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다. 그런 아베 총리가 새달 2일 취임 후 첫 한-일 정상회담에 나선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전망은 한-일 양쪽 모두에서 그다지 밝지 않다. 두 나라 외교당국은 지난 27일 ‘한-일 정상회담을 다음달 2일 열자고 한국이 제안했느냐’는 단순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을 놓고도 말이 엇갈리는 외교 상식상 이해할 수 없는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 양국 외교당국이 서로에 대해 갖게 된 상호 불신이 극에 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번 정상회담의 성패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여러 비관론이 쏟아지지만, 아베 총리에게서 이따금 관찰되는 현실주의적 균형감각에 기대를 걸고 싶다. 한국인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부족하긴 하지만,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집권 이후 역사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후퇴’를 거듭해왔다. 애초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겠다”는 입장이던 아베 총리는 결국 이들 담화를 “계승한다”고 했고, 지난 4월말 미국에 가선 “인신매매로 희생돼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는 말도 했다. 인신매매라는 표현에 대해 한국에선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란 거센 비판이 이어졌지만, 어떤 의미에선 위안부 문제가 인신매매라는 ‘범죄’임을 인정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범죄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고노 담화가 인정하고 있는 바다. 차갑게 얼어붙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불행했던 지난 과거를 직시하려는 아베 총리의 책임있는 말 한마디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리주의자 아베 신조가 아닌 일국의 총리로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는 현실주의자 아베 신조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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