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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5 18:42 수정 : 2015.11.05 18:42

한-미 동맹은 ‘가치동맹’이라고, 입버릇처럼 한국과 미국 정부는 주장해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가치동맹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있는 그대로, 군사동맹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하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보수정권과 미국 정부가 화려하게 포장해온 가치동맹은 종언을 고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치동맹이란 말은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가치동맹을 추구하겠다”고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 때 손상된 한-미 동맹을 복원하겠다는, 다소 수사학적 성격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김성환 전 외교부 장관이 2012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세계문제협의회(WAC) 연설에서 “한-미 동맹은 안보동맹과 경제동맹을 넘어 이제는 가치동맹의 시대를 맞았다”고 선언하면서, 이 말은 전략적 의미를 띠게 된다. 김 전 장관은 “한국이 역동적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해감에 따라 한국과 미국이 지닌 공동의 가치는 양국을 묶어주는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됐다”고 배경 설명을 내놨다.

가치동맹은 한-미-일 삼각 유사 동맹의 군사적 성격을 중화시켜주는 묘약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낙후된’ 중국과 선을 긋고, 한-미-일을 한데 묶어 중국의 부상에 대항하는 유용한 이론적 담론이었다.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들의 대부쯤으로만 여겼던 이명박 정부는 가치동맹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지난해 4월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 뒤에 내놓은 ‘한-미 관계 현황 공동 설명서’ 첫 단락에도 “민주주의·인권·법치라는 공동의 가치는 양국 관계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명시했다.

국정교과서 사태는, 보수정권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가치동맹의 토대와 충돌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고, 행정 예고기간 동안 제출된 의견 가운데 찬성 쪽이 많다며 여론조작까지 벌인다. 이쯤 되면 1970년대 ‘체육관 선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현업 언론인들한테 엄정 대처하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단언컨대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나 전문가들 가운데 이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한국 정부가 중국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청와대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의심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는 ‘빛 샐 틈 없는’ 한-미 동맹에 보이지 않는 내상을 입힐 것이다. 이게 박근혜 정부가 원하던 바인가?

무엇보다 국정교과서 사태는 우리 외교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외교관들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가 의제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력을 낭비해야 했다. 지금이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행여 내외신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국정화에 대한 입장을 묻지 않을까 외교관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사석에서라도 미국 당국자나 전문가들이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외교관들은 기세가 꺾여 한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이번 사태가 미국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인가.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어쩌면 미국이나 유럽보다 베트남을 상대하는 외교관과 주재관들이 지금은 더 힘들 수도 있겠다. 역사 과목을 포함한 전체 교과서를 ‘검정’으로 전환한 베트남 쪽에 우리 외교관들은 국정교과서 전환을 뭐라고 설명할까? “한국사 교과서의 99.9%가 좌편향돼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하고 안쓰럽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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