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19 19:06
수정 : 2015.11.19 19:06
“2000년 11월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이념적이고 오도된 접근 방식은 한·미가 합작해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마련했던 평양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뜻깊은 발전을 비극적이고 부당하게 중단시켜 버렸다.”
얼마 전 신문사 후배가 도쿄로 보내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을 읽었다. 책의 말미,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6월 평양 방문을 회상하는 구절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떠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그레그 전 대사는 김계관 등 북한의 외교 당국자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당시 미국의 사정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어떤 민간 항공기가 일부러 평양의 주체사상탑에 부딪혀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미국인들은 9·11 때 뉴욕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
이어지는 전개 과정은 모두가 아는 바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호명했다. 이후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 방식을 통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북-미 간 ‘제네바 합의’에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로 인해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과, 북-일 관계 정상화의 위대한 첫발이 될 수도 있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평양선언’이 휴짓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 뒤 북한은 세 차례 핵실험을 했고, ‘은하 3호’를 쏘아 올려 상당한 수준의 대륙간탄도탄(ICBM) 기술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사이 한반도에선 비극이 이어졌다. 우린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지뢰 폭발 등의 고통을 겪었고, 아직도 이 비극들이 안겨준 슬픔과 증오 속에서 산다. 9·11 테러라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세계사적 비극이 여러 단계의 ‘나비효과’를 거쳐 한국인들의 삶에 견디기 힘든 상흔을 남긴 셈이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유럽의 한복판에서 9·11에 비견할 만한 거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번 사건은 어떤 방식으로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끼칠까. 섣부른 예측은 어렵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테러의 직접 타깃이 된 프랑스는 앞으로 이슬람국가(IS)를 상대로 본격적인 무력행사에 나설 것이다. 실제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24일 워싱턴, 26일 모스크바를 차례로 방문해 테러와의 전쟁에 미·러 양국의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쟁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된 일본과 한국도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9월 일본의 안보법 제·개정에 따라 글로벌 동맹으로 위상이 올라선 미-일 동맹의 본격적인 데뷔 무대가 될 수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강행 통과시킨 안보 관련법은 바로 이런 때 미군을 후방지원하라고 만든 법이다. 한국도 이 전쟁에 협력을 요청받는 과정에서 미·일 양국은 물론 세계 여론으로부터 자위대와 군사협력을 강화하란 압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렇게 성립된 한·미·일 삼각동맹의 표적은 북한으로, 그리고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중국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로 인해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높아지고 우린 이전보다 더 불안한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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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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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가 2000년대 초 조금씩 피어나던 한반도 냉전 해체의 싹을 잔인하게 잘랐다면, 프랑스 테러는 이런 흐름을 고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불안하지만, 딱히 탈출구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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