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31 18:41
수정 : 2015.12.31 18:41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난 23일까지만 해도 한-일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이렇게 전격적으로 ‘해치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랬다면 아마 24~27일 서울에 머무는 휴가 일정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위안부 합의가 임박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서울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기시다 후미오 외상을 한국으로 보낸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온몸이 전율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결국 저들이 일을 저지르고 마는구나.’ 가장 급한 때 전력에서 이탈해버린 군인과 같은 느낌이어서, 신문사에도 미안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상황이 됐다.
아직 합의가 멀었다고 자신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피해자 할머니들이 납득해야 한다. 외교적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니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순 없다. 그렇기에 평소부터 할머니들의 의견을 성실히 경청하고, 지원단체와 머리를 짜내 안을 만들어 최종 결과가 나왔을 때 할머니들이 “아쉽지만 정부가 이 정도면 수고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할머니들이나 지원단체와 그런 의견 교환, 신뢰 조성 과정을 거쳤다는 얘길 들은 바 없으니 아직 합의가 멀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돌아보면, 낭만적이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합의가 이뤄진 직후 일본 언론을 통해 여러 혼란스러운 정보가 쏟아지는 중이다. 일본의 2대 유력지인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은 30일치에서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소녀상(평화비)의 이전’을 일본 정부가 약속한 10억엔 ‘거출’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에서 논란이 커지자 일본 외무성은 30일 밤 “이번 합의는 (양국 장관이)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한 내용에 그치는 것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한국말도 그렇지만 일본말도 자세히 내용을 보지 않으면 진의를 알기 어렵다. 이 해명에는 “10억엔은 소녀상 철거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소녀상이 철거되지 않아도 지급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일본도 자국 여론이 있기 때문에 소녀상 철거가 이뤄지지 않는 한 10억엔을 입금하진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 당국자가 뭐라 말한다 해도 그렇게 보는 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는 이번 합의가 실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소녀상 철거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동의’가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양국 장관이 발표한 내용에는 “이상의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소녀상 철거가 이뤄지지 않는 한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게 된다. 소녀상에 대한 일본의 집착으로 인해 한-일 합의는 소녀상 철거라는 한국 시민사회의 ‘비준 동의’ 과정을 거쳐야만 효력을 얻게 되는 묘한 구도가 완성됐다.
박근혜 정부는 할머니들과 지원단체를 설득할 의사도 능력도 없어 보이기 때문에 4월 총선이 끝나면 철거를 감행할지 모른다. 이를 막아내는 게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원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새로운 부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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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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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소녀상은 장기간 철거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 것도, 해결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하고 냉랭한 상태로 향후 협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그에 따른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 한-일 관계의 진정한 ‘뉴노멀’일지도 모른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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