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10 20:45
수정 : 2016.03.10 20:52
한반도 정세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상황 호전 조짐은 보일듯 말듯 흐릿하다.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지난달 21일 <월스트리트 저널>의 ‘북-미 평화협정 비밀 논의’ 보도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 보도는 북-미 사이에 ‘탐색적 대화’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정확한 사실이나 해석을 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신문의 보도를 계기로 지난해 11월쯤 북-미 사이에 평화협정 관련 논의가 있었고, 논의가 내실 없이 끝났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돌이켜보면, 북-미 평화협정 논의의 결렬이 ‘나비효과’처럼 이후의 정세 악화에 의외로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올해 1~2월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의 시발점이었을 수 있다는, 개인적인 추론이다.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지난해 10월1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기조연설에서 제안하고, 주유엔 북한대표부가 미국 쪽에 이를 공식적으로 알리면서 평화협정 논의는 시작됐다. 하지만 북-미 양쪽의 간극은 너무 컸다. 북한은 평화협정만 논의할 수 있다고 했고, 미국은 비핵화 논의가 평화협정 논의의 일부분이 돼야 한다고 맞섰다.
워싱턴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도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한 뒤에는 상황 전개에 따라 비핵화 논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 공식적인 회동 자리에서 미국 정부에 이를 확인해주지는 않은 듯하다. 북한으로부터 명확한 신호를 받지 못한 미국도 뒤돌아섰다. 불신의 늪은 깊었고, 양쪽 모두 대화를 지속할 아무런 동력을 찾지 못했다.
이후 북-미는 모두 강경 대응으로 치달았다. 지난해 12월8일 미 국무부와 재무부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작전을 수행하는 전략군사령부를 갑자기 제재 대상으로 올렸다. 북한이 1년 전인 2014년에 수차례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문제 삼았다. 당시에 뜬금없어 보였던 이 조처가 결국 북-미 대화가 무위로 돌아간 것에 대한 미국의 ‘화풀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됐다. 일주일가량 뒤인 12월15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핵실험 진행 최종명령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북-미 대화 결렬을 염두에 두면 또 하나의 퍼즐을 풀 수 있다. 워싱턴 전문가들은 최소한 11월 말까지만 해도 박근혜 정부가 12월11~12일 열릴 예정이던 차관급 남북당국회담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포함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유연성을 발휘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썩 반기지는 않지만 동의할 것 같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당국회담 직전에 워싱턴을 방문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관련해 ‘미국 변수’를 에둘러, 하지만 여러번 거론했다. 이전에 입력된 낙관론적 전망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기해보면, 북-미 논의가 깨진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에 긍정적인 신호를 줬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주도적으로 상황 개선을 시도하기보다 끌려다녔음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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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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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미-중 외교장관 회담 뒤 미국 쪽에서 평화협정 논의 가능성이 거론되자, 정부 일각에선 “평화협정은 우리 한국이 주도적으로 주체가 돼야 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평화협정에 대한 복안도, 협상 실패에 따른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각오도 없어 보이는데 ‘주도적인’이란 말을 내놓으니 공허하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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