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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14 20:05 수정 : 2016.04.14 20:05

1600년 9월15일(양력으로는 10월21일). 일본 중부 노비평야의 세키가하라에 모두 15만여명의 병력이 집결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의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떨쳐 일어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8만4천여명과 ‘덴카토리’(천하를 취할)의 야심을 구체화해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끈 동군 7만4천여명이었다. 역사는 이날을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하루’로 기억하고 있다.

전투가 벌어지던 날, 동서 4㎞, 남북 2㎞에 이르는 전쟁터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아침 8시께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전방에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서군의 주력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가 소규모 부대를 전방으로 내보낸다. 이에 놀란 동군의 철포 사격음에 의해 전쟁 직전 미쳐버릴 것 같은 정적이 깨지게 된다.

일본인들과 한국 정치를 논할 때마다 화제에 오르는 것은 한국의 대통령제와 일본의 의원내각제 사이의 차이다. 가끔 “선거에 졌다고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살벌한 정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돌직구’를 던지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궁색하게 꺼내드는 얘기가 세키가하라 전투다. “한국에선 5년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르거든요. 피바람이 불죠.”

13일 한국의 총선 결과에 대해 일본 언론들도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잇따른 경제 실정과 교과서 국정화 등 권위주의적인 정책에 실망한 젊은층과 중도가 정권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역사엔 “세키가하라의 승자는 이에야스”라는 한 문장엔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다양한 ‘디테일’이 있다.

이번 전투에서 서군인 더불어민주당의 대장은 김종인이었다. 그의 판단은 서군의 주력인 이시다대·우키타대(친노·운동권)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투에 나서긴 했지만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중도를 공략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군의 맹장인 시마 사콘(정청래·이해찬)과 같은 이들의 목을 베었다. 이를 통해 이에야스의 배후에 포진한 모리 히데모토(중도)를 움직이려 한 것이다.

동군인 새누리당에선 혼미가 이어졌다. 전투를 앞두고 부대가 친박과 반박으로 갈렸다. 비열한 내부 학살도 이어졌다. 그러나 대장은 야전에선 져본 적이 없다는 ‘선거의 여왕’이 아닌가. 새누리당은 내분이 전체 전황에 끼칠 악영향을 우려하면서도 늘 그랬듯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변수는 동군과 서군의 측면에 포진한 안철수의 존재였다. 그는 세키가하라의 운명을 결정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같은 존재였다. 고바야카와는 명목상 서군이었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중앙에서 조금씩 승기를 잡아가던 서군의 측면을 향해 달려든다. 이 공격으로 서군의 최우익에서 분전하던 오타니 요시쓰구대가 궤멸했고 전투의 승패가 가려진다.

물론, 한국의 총선 결과는 400여년 전 세키가하라와 같이 흐르진 않았다. 더민주는 국민의당과의 호남 승부에선 참패했지만, 새누리와 맞선 중앙 수도권에선 대승을 손에 넣는다. 이 결과에 대해선 분석해봐야 할 대목이 너무나도 많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일본 언론들은 이번 선거 결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합의의 이행이 불투명해졌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일본이 희망하고 있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체결이 힘들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정권의 대일 정책, 나아가 외교·안보 정책은 수정을 요구받고 있다. 박 정권은 아마도 이번 결과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대선 결과가 가려질 때까지 혼미는 장기화될 것이라 본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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