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21 19:39
수정 : 2016.04.21 19:39
열흘 남짓 전쯤,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외신 기사를 발견했다. 군사전문지 <네이비 타임스>가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과 군사기지화 추진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미국 내에서 갈등이 있다고 보도한 기사였다.
눈길을 끈 대목은 지난해 10월 미국 해군 구축함 래슨호의 남중국해 항해였다. 래슨호가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12해리(22㎞) 안으로 진입한 것은, 실제로는 ‘무해통항권’의 조건에 부합하는 항해였다는 거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당시 래슨호의 항해를 분석하면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력시위’라고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해통항과 ‘무력시위’는 개념의 전제 자체가 다르다. 무해통항권은 연안국의 평화와 안전을 해치지 않으면서 신속한 방식으로 영해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다. 이는 전함을 포함해 모든 국가의 선박에 인정되는 통항권이다. 다만, 전함은 방공망이나 사격 장치 등을 꺼야 한다. 따라서 래슨호가 무해통항을 했다면 전혀 무력시위로 볼 수 없다.
특히, 무해통항은 상대국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래슨호가 무해통항을 했다면, 미국이 명시적으로는 아니지만 중국의 영유권을 사실상 묵인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무력시위를 펼쳤다면, 미국이 중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다수 미국 언론들도 당시엔 무력시위라고 썼으니 변명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뒤 더 당혹스러운 일이 찾아왔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 일본 기자를 만나 <네이비 타임스> 기사를 보여줬다. ‘내가 발견한 기사야’라는 다소 우쭐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이 일본 기자는 기사를 쭉 훑어보더니, “래슨호의 남중국해 진입 직후 미국과 중국 당국 양쪽을 취재해 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당시에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이 일본 기자는 “중국 국내용 발언이었다”고 단정했다. 중국도 래슨호가 무해통항을 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과 중국 정부의 핵심부에 대한 접근성이 일본 기자들에 비해 떨어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좀더 차분하게, 그리고 좀더 다양한 변수들을 폭넓게 고려했어야 했다고, 그날 반성문을 썼다.
중국의 인공섬 건설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미국 안에서 끓어오르면서 오바마 행정부는 뭔가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오바마 2기 행정부에선 필요 이상으로 중국과 갈등 수위를 높이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기조가 있었다. 국내외 여론도 달래고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절충점이 래슨호의 ‘무해통항’으로 나타난 셈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 행정부는 공공연하게 러시아를 ‘제1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정부 입장에선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돼 중국과 러시아가 연합하는 상황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미국의 대외정책 측면에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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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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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기적 관점에서 미-중 간 세력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양국 모두 장기적인 위험 대비 전략의 일환으로 군사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환원론은 자칫 눈앞에서 펼쳐지는 단기적인 흐름을 놓쳐버릴 수가 있다. 예컨대, 미·중 모두 단기적으로 현상유지 욕구가 강하다면, 북한 문제는 갈등보다는 타협을 하는 쪽으로, 해결보다는 관리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판을 넓게, 길게, 다양하게 보는 것은 늘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양 버겁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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