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0.06 17:55 수정 : 2016.10.06 20:40

길윤형
도쿄 특파원

지난 3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 가가와현 출신의 오가와 준야 의원(민진당)이 질문대에 올라선 것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멍한 눈으로 <엔에이치케이>(NHK) 중계를 지켜보다 반사적으로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한 합의 이후 한국 정부에서 아베 총리에게 사죄의 편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답변은 짤막한 세 문장이었다.

첫 문장. “합의 내용을 양국이 성실히 실행해 가는 게 요구되고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수백번을 되풀이해온 공식 입장으로 그리 놀라운 내용이 아니다.

두번째 문장. “오가와 의원이 지적한 것은 (합의) 내용 밖에 있다.” 이 언급을 통해 아베 총리가 한국이 “기대한다”고 밝힌 ‘사죄 편지’ 등 추가 조처에 대해 응할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졌다. 애초 별 기대도 없었던 만큼 실망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세번째 문장이었다. “우리는 ○○ 생각하고 있지 않다.” 3년 동안 일본에서 여러 산전수전을 거쳤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 문장에 담긴 부사 하나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녹음 내용을 되풀이해 듣다 재일동포 지인과 일본 기자에게 녹음파일을 보내 감정을 요청했다.

이들이 보내온 회신에 담긴 부사는 ‘모두’(毛頭)라는 단어였다. 국회 답변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런 도발적인 표현을 사용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전할 ‘사죄 편지’를 요구하는 한국의 요청에 그럴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답한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도저한 무력감이 엄습해 왔다. ‘고노 담화’(1993)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 4일 일본 방송에 나와 지적한 대로 아베 총리의 “인간성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 12·28 합의 이후 한·일 시민사회에선 이 합의를 어떻게 볼지를 둘러싸고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해 왔다. 하나는 합의를 무효화하고 원점에서 재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백지 철회론’, 다른 하나는 총리의 사죄 편지 등 보완적인 조처를 통해 합의의 부족한 점을 메우자는 ‘보완론’이었다. 백지 철회론은 한국을 둘러싼 엄혹한 외교 현실을 생각할 때 선택이 불가능하고, 보완론은 아베 총리의 이번 ‘털끝’ 발언으로 파탄에 이르렀음이 분명해 졌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제3의 길을 제안해 본다. 명명하자면 ‘합의 고사론’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진 12·28 합의라는 불리한 전쟁터에서 조직적으로 퇴각해야 한다. 이 합의를 어떻게든 정당화해 보려는 안쓰러운 노력은 그만두길 바란다.

먼저, ‘화해·치유재단’은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10억엔의 집행을 중지하고 상황을 관망해야 한다. 나아가 일본 정부의 관심사인 소녀상 문제에 대해 좀 더 원칙적인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난 합의에서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했을 뿐, 이전 자체를 약속한 바는 없다. 아베 총리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면 소녀상 이전은 “(합의) 내용 밖의 일”이다.

정부는 합의에서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판·비난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민간단체가 여성의 보편적 인권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적인 노력까지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민간단체의 활동을 지금보다 더 정력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라는 고통스러운 역사적 아픔을 겪은 한국 사회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가 12·28 합의가 아니라면, 서서히, 그렇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합의와 결별해 가야 한다.

charisma@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